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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시작하는 마음 May 16. 2024

반갑지 않은 청첩장

축하는 먼저, 생각은 나중에

사촌동생에게 청첩장이 왔다. 불쑥 그리고 뜬금없이. 그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아이가 고등학생, 내가 대학생 시절에 만났던 기억까지만 선명하다. 아마 그 이후로 명절이나 장례식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고 20년 전에 보고 이후 소식을 몰랐던 그에게 연락을 받고 한참 동안 생각이 많았다. 나는 그의 직업도 나이도 모른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간단하게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는 한국에 오면 한 번 만나자는 뻔한 인사로 마무리했다. 요즘 청첩장에 친절하게 적혀 있는 계좌번호로 축의금을 보냈다.


그는 왜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축의금을 받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에 하루 내내 마음이 시끄러웠다. 축의금을 보내 놓고 액수가 너무 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로 인해 친척들과의 관계도 거의 단절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가난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나의 부모의 품격 없는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힘든 일이 생길 때 동생들에게 돈을 빌렸다. 돈을 빌려주는 동생이 있었을 것이고 빌려주지 않은 동생도 있었을 것이다. 돈을 빌려주었던 동생은 우리 아버지가 돈을 갚지 않아 연락을 끊었을 것이고 돈을 빌려주지 않았던 동생은 아버지가 서운함에 못 이겨 스스로 연락을 끊었을 것이다. 나에게 청첩장을 보냈던 그 사촌동생은 돈을 빌려주었던 동생의 아들일 것이다.


청첩장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했던 나는 이 모든 일이 나의 부모의 잘못된 처신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부모님이 더 원망스러웠다. 부모에게 벗어나서 잘 살고 있는 나에게 한 번씩 투척되는 부모와 연관된 사건들은 견디기 어렵다. 청첩장 하나에도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내가 싫었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면 마음까지 가난해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생각으로 이리저리 뒤척이며 하루를 보냈다. 오늘은 사촌동생의 아버지인 나의 작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는 나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작은 아버지는 나에게 살가운 편이었다. 나를 만나면 용돈을 주었고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다. 나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땠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그는 안전하고 무해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축의금도 냈다. 작년에 나의 언니가 다른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서 그 작은 아버지를 만났는데 이제 다시 보고 살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나에게 전했다.


나는 나의 작은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을 계기로 또는 핑계로 우리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던 거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이 모두에게 편안한 결론이다. 나도 더 상처받지 않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 사소한 일에 너무 많은 역사를 갖다 대거나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의 작은 아버지가 나에게 축의금을 냈으니 나도 그의 아들에게 축의를 하는 것이 맞다. 나의 작은 아버지가 낸 축의금은 마땅히 나의 아버지가 해결해야 할 마음의 짐일 테지만 나의 아버지가 어디까지 감당할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축의금을 보냈다. 평소에 친하지 않은 사촌누나에게 연락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사촌동생의 용기가 가상하고 아무리 축의금이 받고 싶어도 연락하기 싫은 사람한테는 연락을 절대로 못하겠다는 남편의 말이 위로가 되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뻔뻔하게 축의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마음이 편한 쪽으로 믿어보고 싶다.


사소한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보다 간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싶다. 사소한 것들에 많은 에너지를 쓰니 사는 게 피곤하다. 이 글을 쓰면서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나는 한국에 있겠지만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보다 간결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계부터 간결해져야 한다.


사진: Pixabay,  Ricarda Mölck님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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