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향 Nov 06. 2024

삶을 견디는 지혜

정지아 작가의 문학 강연

  <2024 부여에서 신동엽 시인을 만나다> 행사에서 무엇보다 기대가 된 건 정지아 작가의 특별 강연이었다. 재미있게 읽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저자인 정지아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지 사뭇 기대가 됐다. 행사 며칠 전부터 주최측에서 메일로 자세한 일정과 준비사항, 주차장 정보 등을 세심하게 안내해 주어 행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기분이 좋았다.


  저녁을 먹은 뒤 드디어 기다렸던 정지아 작가의 특강 시간. 강연이 이루어진 실내 공간은 계단식이 아니어서 맨 뒤쪽 자리에 앉은 나는 미어캣처럼 목을 길게 내빼야만 작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내 오른편에서 실시간 라이브로 강연을 송출하는 모니터 화면을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잘 보였다. 없이 작가의 목소리만 라이브로 듣고 얼굴을 모니터로 보면서 강연에 집중했다.


  정지아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관련해서는 짧게 언급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친구들은 왜 이렇게 많이 찾아오지?', '이건 소설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게 되었다고 했다. 정지아 작가가 처음에 이 소설에 붙인 제목은 <이웃집 혁명 전사>였다. 출판사에서 제목에 대한 회의 중에 어느 직원이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제안했는데, 당시 인기 드라마의 제목과 너무 비슷해서 작가는 흔쾌히 내키지 않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제목이 잘 먹힌 것 같다며 그 뒤로는 출판사의 얘기를 잘 듣는다며 웃음지었다. 사실 이 소설이 이 정도로 잘 될 줄은 몰랐다고, 주제의 무거움에 비해 형식이 가벼워서 이 책이 잘 된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그 전까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주변에서는 소설이 너무 진지하고 딱딱하고 어렵다는 말을 많이 했단다.   



 서울에 살던 정지아 작가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몇 년 전부터 고향인 구례에 내려가 살고 있다.

  "구례에 내려와서 차별없이 사람을 보는 마음, 해학과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소설이 나올 수 있었어요. 시골에서 주저 앉아 있다보니 오히려 사방이 다 보이고 몸도 훨씬 편해졌어요. 오늘은 소설에 대한 얘기보다 구례에서의 삶에 대해 얘기하려 해요."


  정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은 선진적인 흐름 속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자유주의 시대에 구례는 너무나도 뒤쳐지는 곳이라고 했다. 시대에 뒤쳐진 시골에서 어떻게 글을 쓸 수 있을지 걱정도 많았다고. 그럼에도 구례는 정 작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고 변화시켰다. 구례에 사는 할매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인생의 지혜와 통찰을 배울 수 있었고, 그들의 언어에서 말의 의미를 부여할 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봄 날, 수많은 외지인들이 구례로 벚꽃 나들이를 한창 올 무렵에 작가는 위스키 한 병을 점퍼 속에 넣고 혼자 벚꽃 산책을 나섰다. 마침 가는 길에 일을 마친 동네 할매가 있길래 인사를 했다. 작가는 평소와는 다르게 할매에게 함께 벚꽃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듣고 구례 할매가 말했다. "쨔(벚꽃)는 정 없소." 정을 나눌 새도 없이 빨리 지는 벚꽃을 두고 한 말이다.  

  산수유를 두고 그 할매는 이렇게 말했다. "갸(산수유)는 속 없어." 오래 전 시골에서 아이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이기도 힘겨웠던 때, 밥 때가 되었는데도 자기 집에 돌아가지 않는 아이의 친구를 떠올리며 한 말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구례 할매들은 꽃나무를 두고도 삶과 관계를 이야기한다.  


  작가는 구례에 와서 자신이 지극히 엘리트주의자였고 시덥잖은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은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살까. 구례에 살고 있는 할매들 중에 공부 잘하고 출세한 아들을 둔 할매는 바쁘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찾아오지도 않고, 잘난 아들을 마냥 어려워한단다. 교수 아들을 둔 할매는 교수 부모를 둔 좋은 집안의 며느리를 들였는데, 그 며느리는 시댁이 천박하다고 오지도 않고 심지어 아이를 보내지도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공부도 못하고 늙어서도 엄마에게 얹혀 사는 아들을 둔 할매는 매일 아들한테 잔소리하고 속풀이를 할 수 있다. 그 아들이 할매의 욕받이가 되어 주어 오히려 즐겁고 활기차게 살아간다. 못나고 부족한 아들이라도 이렇게 쓰일 데가 있는 법이라 정 작가는 농담을 했다.




  "주어진 고통과 역경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 온 사람은 지나온 고통을 풍자하여 가볍게 말할 수 있어요. 삶을 견디는 자세가 중요해요."


    정 작가는 자신의 상황을 직면하고 견디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구례에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직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구례에 살고 있는 한 아이의 엄마가 바람이 나서 아이도 버리고 집을 떠났다. 혼자 남은 그 아이에게 할매들은 서슴없이 말한다. "니 엄마는 너한테 연락 안 허냐." "어이구, 남자가 그렇게 좋다냐..." 아이는 그런 말을 들으며 상처를 받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의 상황과 존재를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직설적인 말을 던져 놓은 할매는, 한편으로 아이가 짠해서 부침개를 부치면 잊지 않고 아이에게 가져다 준다. 그런 할매들 속에서 그 아이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굳건하게 또 살게 된다고.


  힘겨운 삶을 견디는 데에는 무엇을 키우는 일 만한 게 없다며, 정 작가는 고양이 '그냥이'와 '저냥이'를 키운다고 했다. 고양이의 새끼 이름은 '구글'과 '애플'이란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강연을 마쳤다.


  민사고에서 국어를 가르친 교사 출신이어서 그런지 강연 내내 정지아 작가의 입담이 엄청났다.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한편으로 유쾌하고도 진솔하게 풀어냈다. 청중들은 작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유머 넘치는 화술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구례 생활 속에서 얻는 작가의 통찰과 삶에 대한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