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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Oct 09. 2021

02. 아이슬란드 식물원에 자원봉사를 간다고?

워크캠프 참가신청서가 나에게 물었다. 직업과 소속을 뺀 너는 누구냐고.

눈가리개를 찬 경주마처럼 아이슬란드행만 보고 질주하려던 내 마음은, 워크캠프 신청 단계에서 곧바로 급정거했다. 아이슬란드 내엔 너무나도 많은 프로그램이 공고 중이었고, 나는 그중 한 개를 콕 찍어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리 염두 해 둔 주제나 프로그램은 없었다. 프로그램 제목들을 클릭하자 세부내용이 모두 영어로 안내되어 있었다. 갑자기 시험지를 앞둔 수험생처럼 긴장이 되었다. 콧잔등에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고, 매의 눈이 되어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는 자연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워크캠프 프로그램도 거의 다 환경 관련 활동이었다. 피오르드 해안 생태계 보전 활동, 해안 청소 및 정화 활동, 섬 하이킹 코스 보수 관리, 오프로드 드라이빙으로 파괴된 지역 재건 작업, 사진 촬영 및 전시 활동, 식물원 가드닝 및 보수 활동, 요양원 가드닝 및 허브티 만들기 등등. ‘용암, 피오르드, 협곡’ 같은 단어들은 읽기만 해도 왠지 웅장하고 모험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매년 구청에서 보급하는 ‘베란다 텃밭 가꾸기 키트’ 애호가인 나로서는 ‘가드닝’이라는 단어가 더 끌렸다. ‘얼음의 땅’에서 ‘가드닝’이라니, 뭔가 언밸런스하고 아이러니한 느낌이 꽤나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요양원으로 갈까 식물원으로 갈까, 그것이 문제로다. 

요양원은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온천 마을에 있으며, 자연치유 클리닉으로 명망 있는 곳이었다. 건강한 식자재를 얻기 위한 온실과 쾌적한 환경을 위한 정원이 잘 갖춰져 있는데, 예정된 업무는 토마토, 오이 등을 수확하거나 허브로 차를 만들거나 정원 보수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식물원은 레이캬비크시가 운영하는 곳으로 시내 중심가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교육, 연구, 즐거움을 위해 5천 여종의 다양한 식물을 보존하고 기록하는 곳이었다. 예정된 업무는 무료로 개방되는 공원을 유지 보수하고, 다년생, 고산식물, 관목 등의 원예 작업을 돕는 것이었다.     


유명한 지열지대라서 동네에 스팀 계곡과 온천수 시냇물이 흐른다는 점, 숙소 시설이 매우 쾌적하다는 점, 북유럽의 복지시설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요양원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시내가 가까워 외출이 자유롭다는 점, 다양한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 숙소를 다른 워크캠프 프로그램 참가자들과 공동 사용하므로 더 많은 이들과 교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식물원도 포기하기 어려웠다. 결국 꼬박 이틀을 더 고민한 후에야 결심이 섰다. 가자, 식물원으로! 갈팡질팡 하던 내 마음 속의 결정적 한 방은 숙소가 식물원 내에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생에서 가능할까 싶었던 ‘정원 딸린 집’의 꿈을 잠시나마 이뤄볼 수 있다니, 심지어 그 정원이 무려 만 오천 평 넓이라니!         


마음을 굳혔으니 후딱 신청서를 써야지. 그런데 아뿔싸. 작성 문항을 술술 채워나가던 중 “Please list your any technical skills”란 항목 앞에서 망연자실해졌다. 나에게 기술이나 솜씨라고 할 만한 게 있었나? 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나름 성실한 직장인으로 열심히 살아왔건만, 내세울만한 특기랄 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잘하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직장 경력이 쌓여갈수록 자신감이 높아져야 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부족한 점만 더욱 신경 쓰였다. 언젠가부터 내가 '그럭저럭한 인간'이 되어 버린 기분이 들곤 했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온 주인공처럼, 특기라곤 아무리 뒤져봐도 ‘폭탄주 제조술’ 밖에 없는 동네 아저씨가 되어버린 듯 씁쓸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한 장면. 조기유학 중인 아들의 과제인 '아빠 특기 촬영', 아무리 생각해도 특기가 없던 주인공은 결국 직장인의 비애가 담긴 폭탄주 제조술을 선보인다


지원동기서가 나에게 묻는 것 같았다. 직업과 소속을 뺀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냐고, 무엇을 잘하느냐고... 신입사원이 되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심히 답변했던 그 물음들이, 낡은 직원이 되면서 부터 어느 순간 더 이상 묻지 않게 된 그 질문들이, 다시 내게 되돌아왔다. 이번 워크캠프가 ‘내 우주의 두 번째 빅뱅’이 되길 바랐더니, 벌써부터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 시작된 셈이다.     


갓 취업전선에 뛰어든 구직자의 자세로, 연말 근무평가 시 자가평정하는 심정으로, 강점 관점과 무한한 자기긍정으로 나를 살펴보느라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다행스럽게도 긴 응시 끝에 할 말이 떠올랐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고객들 사이에서 의견 조율하는 일을 오래 한 터라 갈등이 있을 때 중재하고 타협하는 일, 경청하고 설득하는 일에 능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 장남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줄줄이 동생과 사촌들을 돌봐야 했고 학창 시절엔 교육 봉사활동 경험도 많았으니 어린이 돌봄과 교육도 자신 있었다. 베란다 텃밭 가꾸기도 꾸준히 하고 있으니 기초적인 가드닝도 안다고 할 만했다. 막혔던 말문이 한번 트이니 하고픈 얘기가 술술 나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예쁘다더니, 과히 나도 그러했다. 계속 보다 보니 점점 더 괜찮은 구석이 많아 보였다. 왠지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 같았다.      


한껏 고양된 기분으로 참가신청서를 완성해 제출했다. 그리고 열흘 뒤 아이슬란드로부터 답장이 왔다. 

“참가를 환영합니다!” 

합격이다! 십오 년 만에 드디어, 내 인생의 두 번째 워크캠프가 열린다. 당장 최저가 비행기 티켓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아이슬란드 식물원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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