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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부는 버드나무 Jul 20. 2023

각자의 몸만큼 각자의 몫을 감당한다.

이혁진 장편소설 <관리자들>을 읽고

#. 오지 않을 멧돼지, 내리지 않는 눈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가상 멧돼지는 불만을 잠식한다. 과장된 때론 허황된 위협요인을 설정해 내부를 통제하고 억압하는 고전적 통치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허깨비는 때론 바다 건너 조선이었고, 때론 빨갱이였으며, 돈이 제일 무서워진 요즘 시대엔 종종 경영위기로 둔갑한다. 가공된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헛된 수고와 정신적 압박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은 노상 권력의 가장 밑바닥이다. 모르니 속고, 시키니 할 수밖에 없는 힘없고 성실한 자들. 소설 <관리자들> 속 주인공 선길이 당하는 부당한 고통에 화가 났던 건, 우리들 역시 가짜 멧돼지의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 삶이 무력해서 마음도 가난해진 사람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가난한 마을에 정이 있다고 믿던, 가난한 가정에 소박한 따스함이 넘친다고 믿던. 하지만 이젠 부족함 없이 자라서 구김살 없다고 믿고, 돈 있는 자리에 여유도 깃든다고 믿는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나는 더한 것도 당했는데’, ‘내가 아니라 다행이야’. 각박한 삶과 무한경쟁의 부추김은 각자도생 속 균열과 고립을 강화한다. 동료(타인)의 피해와 고통에 무감해지고, 가짜 뉴스에 더욱 선동당한다. 오직 이성적으로 사태를 보는 자, 연민할 줄 아는 자만 중간에서 괴롭다. 도와주지 못한다는 무력감, 불의에 저항하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책망. 고통의 가해자(관리자)에겐 비난도 반성도 없는데, 왜 지켜보는 자(동료)가 되레 자괴감을 느껴야 하나.         


#. 무리한 과업과 부당한 대우 앞에 도덕적 해이를 논하지 말라.     


  애당초 무리인 마감기한, 갈아 넣고 쥐어짜면 다 된다고 믿는 “하면 된다” 시절의 후진적 리더십. 이런 상황에서는 중간 관리자들도 품질보다는 속도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보기만 그럴싸하게, 대충 와꾸만 맞게!”. 어차피 업무를 지시한 관리자가 속속들이 알지 못하니(물론 뭘 모르니 그렇게 말도 안 되게 일을 시켰겠지!) 중간관리자는 ‘눈감고 아웅’하고, 실무자들은 절대적으로 시간과 자원이 모자란 상황에서 어차피 잘해봐야 알아봐 줄 이도 없으니 “대충 한 티만 나게” 하게 된다. 열심히 하면 나만 바보고 손해라는 생각, 어차피 완성도가 아닌 완료여부가 중요하다는 방침, 시키는 대로 충실히 일 할수록 책임질 사항(혹은 감당할 위험)만 더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면, 태만과 도덕적 해이를 비난만 할 수 있을까. 나름 경험에 기반된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선택)인 것을.     


#. 기득권의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자는 누구인가


 애석하게도 이 불의한 시스템을 흔든 건 희생자의 탄생-선길의 죽음이다. 속도전을 앞세운 부실공사였으니 사고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오래된 미래’였고,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낙관적이었기에 선길은 그 누구보다도 충실히 위험 앞에 노출되었다. 하지만 “책임은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던 소장은 능숙하고 순발력 있게 자기 몫의 책임을 최소한으로 만들고,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죽은 자/생에서 퇴출된 자)에게 전가한다. 사고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도 저마다 도덕적 우월감(공감과 낙관)과 도덕적 무력감(체념과 비관)으로 동조한다. 오직 단 한 사람, 현경만이 침묵의 카르텔에 동참하기를 거절한다. 유가족에게 자신이 아는 진실을 전하고, 허위로 가득한 현장식당에 ‘드디어 찾아온 멧돼지’가 되어 돌진한다.


 작가는 ‘젊은, 여성’이 ‘굴착기 운전자이자’, ‘구질서에 저항하는 자’라는 설정을 통해 젠더 고정관념의 전복을 꾀하지만, 독자로서는 그녀가 ‘굴착기를 보유한, 공사판 내 전문기술을 보유한, 구직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업무가 비교적 독립적인, 타 인부들과 밀접도가 낮은, 심리적으로 외지인인 자’라는 점도 끝내 간과하기 어려웠다.      


견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는 자는 누구일까.

나는 혹은 우리는 그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가짜 멧돼지’는 누구인가,

지금 우리에게 ‘내리지 않는 눈’은 무엇일까.     


나를 결국 침묵하게 만드는 우월감 혹은 무력감은 무엇인가.

내가 결코 희생시킬 수 없는 것(선길의 ‘개’처럼)은 무엇인가.   

  

‘각자의 몸만큼 각자의 몫으로 감당한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도대체 이상적인 관리자란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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