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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Oct 24. 2021

괴로울 때는 카약 타고 제주 한 바퀴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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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진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된 여행 중에 유쾌한 미소를 무기로 백혈병과 싸우던 어여쁜 소녀를 만났다. 소아암 치료센터가 없는 제주에서 소녀와 소녀의 가족 모두는 힘겹게 투병 생활을 이어오고 있었다. 진정 신이 있다면 그것은 <내 안의 양심>이라고 믿는 무신론자에게 그날 신은 명령 했고, 나는 가난한 나의 신을 섬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다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풍요로운 시간과 머리카락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자유를 향해 거칠게 자라던 머리칼은 들개를 가축화시키듯 방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관리 없이 무성하게 자라 뒤엉키고, 바다 냄새로 짙게 물든 머리칼에서는 어느덧 오이 비누향이 났다. 이제 집으로 들어올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다음날 곱게 빗은 머리카락과 부엌 가위를 들고 제주 한 바퀴 일주를 떠났다.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저마다의 몫을 잘라달라 부탁했고, 그렇게 많은 이들에 의해 한 줌씩 잘려 나간 머리카락은 소아암 백혈병 센터에 보내졌다. 그리고 그 짜릿함을 즐긴 유흥 값으로 받은 금액 전부는 소녀의 가족에게 전달됐다.

첫 번째 머리카락 기부여행에서 제주 한 바퀴를 돌며 모은 금액은 200만 원. 더 이상 기부할 머리카락은 없지만, 이 즐거운 기부 여행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마침 제주도의 둘레가 약 200km 인 것을 착안해 2013년부터 해마다 올레길 도보 일주, 자전거 일주, 버스킹 일주 등 다양한 이동 방식으로 제주도 한 바퀴를 돌며 키로 당 만원씩 기부하는 펀드레이징 여행을 기획했다. 그리고 이 여행의 이름을 <다가치 달리는 소나기>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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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함께, 혹은 릴레이로 일주하던 여행 방식에서 2019년 여름은 매우 사적인 이유로 나 홀로 카약을 타고 뱃길로 제주 일주 기부여행에 도전했다. 그해는 유독 괴로운 일이 많았다. 누군가를 아쉬움없이 마음껏 미워도 했고, 대화의 목적을 잃고 대박적으로 옹졸해져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마음속 괴로움이 배출없이 쌓여 이제 곧 내가 탈이 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좋은데, 나는 종교가 없으니 바다에 의지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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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약 일주 첫 번째 날


뭍에 선 사람들에게 웃어 보이며, 호기롭게 첫 물을 떠 바다로 노 저어 나갔지만, 곧 아득해졌다. 성산항 주변 큰 배들이 오가는 뱃길은 너울이 심해 전복될 뻔한 아찔한 순간도 몇 차례 있었다. 허리보다 높은 파도를 한 번 타고 내려올 때 배와 같이 떨어지는 심장을 안전히 받아내기를 여러 번, 다소 잔잔한 바다로 무사히 피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게다가 시시때때로 변하는 제주바다를 되도록이면 빨리 지나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할지 모른다는 근거 없이 합리적인 나의 습관적 낙관주의로 <sit in> 카약을 선택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탄 sit in 카약은 속도는 빠르지만, 부표의 원리로 만들어진 sit on 카약에 비해 안정성은 현격히 떨어져, 전복 시 배를 다시 원 궤도로 올려놓는데 훈련된 능숙함과 강한 체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육상에서 이동할 때와는 달리 위급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처해줄 보호선(요트) 없이 홀로 바다 떠 있는 상황에서 만에 하나 자연이 내게 자비 없이 달려든다면, 과연 운이 내 편을 들어줄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30대 이상의 남자들은 <나는 세상 모든 이성을 유혹할 수 있을 만큼의 여전히 매력 있다>는 착각, <내 육체는 여전히 20대처럼 젊다>는 착각,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나는 모든 내가 원하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을 하며 살아가는데, 이중 두 개 이상의 착각을 가진 사람은 쉽게 곤경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를 가진 사람을 이미 곤경에 처해있다.


그게 바로 지금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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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약 일주 다섯 번째 날


바다가 뒤집어지면 낚시꾼들은 신이 났고, 카약꾼은 조마조마했다. 태풍급 비바람이 쏟아지고 난 다음날, 여전히 바다는 성나 있었지만 주말까지는 서귀포에 도착해야 하는 터라 조급해하며 배를 띄웠다. 보호선(요트) 대신 육상에서 차량으로 이동하며 바다의 상태와 나의 컨디션을 꼼꼼히 체크해준 코치, 촬리 덕분에 무탈히 지금까지의 최대 난코스 차귀도 수월봉 코스를 넘었다. 내일은 내일까지의 최대 난코스 모슬포 송악산을 지날 예정이다. 그곳은 조류가 거꾸로 흐르고, 유속이 빠르기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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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약 일주 여섯 번째 날


마의 구간 모슬포를 지나고 있다. 모슬포는 바람과 파도가 사람이 못 살 만큼 거센 바다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사계 해변을 목표로 2시간 동안 노를 저었지만, 겨우 500m 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만큼 이곳은 바람도 파도도 조류도 무척 세다. 높이 2미터 파도에 부딪혀 몇 번이나 전복 위기를 겪고, 더 이상 전진은 힘들다 판단, 방향키를 돌려 안간힘을 다해 뭍으로 올라왔다.


내 눈에 심해보다 깊은 다크서클이 피어 있었다. 내 심장도 근육도 엄청 쫄깃쫄깃해졌다. 이래서 모슬포 방어가 맛있구나 싶었다.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는 말 대신 이 여행이 끝나면 나는 엄청 맛있어질 거라고 짝꿍에게 여유 있는 척 농담을 던졌지만, 카약 안에서 오줌을 지린 것은 당분간 모두에게 비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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