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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Oct 24. 2021

조난신고 119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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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약 일주 아홉 번째 날


모슬포에서 사계 앞바다를 지나 박수기정까지 20km 도 안 되는 거리를 지나는 데 총 3일을 소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앞에 중문 요트 선착장이 보였다. 서퍼들이 반기는 중문의 파도는 카약커에겐 무척 성가신 것이다. 일기 예보에선 날이 분명 좋을 것이라 했다. 물때도 좋았고, 조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중문 해수욕장을 지나 코지를 돌아 나오자마자, 갑자기 바다가 변했다. 파도는 훨씬 거칠어졌다.
 그리고 강한 조류를 계속해서 반대로 넘던 탓에 카약 꼬리 방향키가 끊어졌다.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파도가 일 때마다 배에 물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카약은 더 이상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어쩌면 한 번은 오리라> 하던 그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즉시 구명조끼 안 방수팩을 꺼내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촬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난 신고해줘>

그리고 이내 배는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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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 오토바이로 전국 여행을 하다 부산에서 큰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주마등을 봤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이것이 죽음> 인가하는 공포를 10년 뒤 서귀포 바다에서 다시 한번 느꼈다.

내가 탄 sit-in 카약은 추진력과 가속도가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전복되었을 때 비교적 회복력이 좋은(다시 정상 운행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체력이 비교적 적은) 튜브 형식의 sit-on-top 카약과는 달리 하체를 카약 안에 넣고 달리는 방식이라 전복 시 발을 잽싸게 뽑아내지 못하면 익사할 수도 있다. 카약 일주를 시작하기 전 몇 번의 전복-회복 훈련을 했지만, 실제상황에서는 그때의 여유로움은 없었다.


‘아뿔싸, 발이 빠지지 않는다.’


 난 몹시 당황했고, 한 차원 높은 밀도의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그때 마침 큰 너울이 일어 카약이 크게 흔들렸고, 그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다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바닷물은 많이 마셨지만. 내 손에 새겨진 긴 생명선 끝에서 똥 내음이 난다던 점바치 아저씨의 농담이 제발 농담이 아니길 바랬다.


뒤짚힌 카약을 부여잡고 혼자 바다에 표류해 있던 시간은 겨우 2-30분. 여름이면 늘 바다에 산다는 말을 들을 만큼 바다를 좋아하는 내게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 초침을 붙잡고 온몸으로 버티고 선 마냥 시간은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그와는 반대로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 거센 너울을 만들었고, 파도는 나를 바다 깊이 밀어 넣으려 했다. 바닷물을 300ml 삼다수 한 병 정도 마셨을 때 저기 멀리서 해경정이 보였다. 난 온 힘을 다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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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와 공포가 혼재된 순간 그리운 사람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함 대장님.


태양 가장 가까이 날아 올라 그을린 피부와 바람이 조각한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웅장한 산의 협곡을 닮은 주름을 가진 그는 우리나라 대표 액티브 패러글라이더이자 탐험가이다. 함덕 서우봉 아래 조그만 카페에서 우린 종종 만나 그는 내게 자신의 여행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해 그는 네팔로 원정 훈련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지인으로부터 그의 사고소식을 전해 듣고 참 많이도 원망했다. 그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을 뒤에 남겨 두고서라도 그토록 바람을 찾아 나섰던 그의 열정과 고독이 미웠다. 그러나, 그라는 사람이 지금까지도 내게 이토록 강렬하고 아름답게 묘사되는 이유는 <그는 심장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훈이씌, 이승에서 영원히 살길 원한다면,
심장이 시키는 일을 하세요

살아서 그가 내게 해 준 마지막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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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치 달리는 소나기는 나의 양심과 심장이 시키는 일이다.


양심은 내게 말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해라. 그래야 네가 무너지지 않고,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심장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 자유롭다. 모든 감각을 사용하여 존재하는 모든 순간 감동하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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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어부에게 만선을 약속한 적이 없다. 삶은 내게 풍요를 약속한 적이 없다. 다만 삶과 바다는 죽음을 들이밀며 내가 자주 잊고 지내는 <나는 살아있다>는 기적 같은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일 년 중 나는 고작 며칠이나 <살아있다> 말할 수 있나, 하루 중 나는 얼마나 온전히 <존재한다> 말할 수 있나, 이 질문 앞에 당당하지 못하면서 나는 정녕 <자유롭다> 단언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내 일상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함대장은 그 누구도 찾아올 수 없는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사라진 이곳에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와주었구나.


<나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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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에 가까워지면서, 포구에 서서 한참을 애타게 울부짖던 촬리 코치의 목소리가 그제야 얇게 들렸다. 옆에는 119 구조대가 와있었다. 한 손은 카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필사적으로 바닷물을 잡아채며 검은 바위 쪽으로 헤엄쳤다. 그리고 뭍을 밟자마자 안도와 함께 저체온증이 왔다. 구조대원들은 응급처치를 시작했고, 언덕 위에서 촬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간신히 까딱거리며 촬리에게 말했다.


<야 사진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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