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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Oct 24. 2021

트로피는 받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카약 일주 열여섯 번째  


다시 바다에 왔다.

검은색 돌에 부딪혀 깨진 파도가 손끝에 닿았다. 순간 온몸에 닭살이 오른다. 몸은 그날의 두려움을 기억하고 있다. 최초에 나는 <정복>하려는 가소로운 마음으로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아뿔싸, 도망치듯 뛰쳐나오는 내 모습은 청무우 밭에 흰 날개 젖어 비틀거리는 나비의 애처로움이었으리라.

바다가 미워 실컷 흉을 보았다.


바다같이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상형이라면 어서 맘 고쳐먹어라.
아름다운 윤슬 수놓는 그럴싸한 취미 가진 그녀는 저를 찾는 이에게 제 가진 것을 값없이 내어주지만,
이따금씩 미치고 앉아 거칠고 과격하게 울부짖다, 자비 없이 집어삼키기도 한다.
그러다 또 반색하여 밤에는 누군가에게 
낭만을 선물하니 도대체 이런 죽 끓여 먹을 변덕이 어딨나.


헌데, 나의 원망과 두려움의 대상은 정말 바다일까? 그녀는 바다를 뒤집어 생명을 순환시키는 늘 해오던 일을 그날도 어김없이 하고 있었다. 바다는 나를 초대한 적도, 나의 출입을 허락한 적도, 그렇다고 방해도 한 적도 없다. 사실 지금 내가 바다에게서 느끼는 공포와 괴로움은 결국 내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 아닌가? 


유치함은 관계를 망친다. 하지만, 때때로 큰 존재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몸짓을 요구할 때도 있다. 나는 유치한 표정과 유치한 말투로 섭섭한 마음을 마음껏 바다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날카롭고, 뾰족한 내 원망이 몽돌처럼 둥글어졌을 때 나는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다시 바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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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약 일주 마지막  


한 여행가를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첫인상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 지으며 내게 인사를 건네고, 자기 몸집보다 훨씬 더 큰 가방을 내 앞에 쿵 내려놓았다.


분명 여행자라면 좀 더 멀리, 높이 오르기 위해 소지품의 크기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진열장이나 귀중품 보관함에나 보관해둘 법한 온갖 메달, 트로피 같은 것들을 하나둘씩 꺼내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세계여행을 몇 번이나 다녀왔어, 스페인 '순례자 길'의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니까. 여기, 내 사타구니 좀 봐. 캐나다 배낭여행 때 베드 벅스에 물린 상처들이야, 이건 중국 고위 정치인이 내게 하사한 청나라 찻잔이야. 그와 나는 아주 막역한 사이지>

그뿐 아니다. 잘 나가는 방송인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의 인맥을 과시하고, 자신이 돌싱이라는 걸 강조하며 결혼과 이혼, 사랑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 본인 직업의 특수성과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지 묻지 않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힘주어 뱉어내면서 장대한 자기소개의 끝을 맺었다.


탐험가라는 직업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자신이 사냥한 호랑이 가죽의 크기나, 두 눈으로 목격하고, 경험한 기상천외한 사건을 얼마나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는가에 따라 직업의 전문성이 가늠된다. 탐험할 미지의 세계가 줄어든 오늘날에는 여행가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데, 이들 또한 탐험가의 그것처럼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그들만의 특별한 여행기가 있어야 먹고살 수 있다. 나 또한 여행을 노래하는 직업을 가진 여행가이지만, 자신의 여행을 방문 판매하듯 간증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그의 여행이 즐거움보다는 노동자의 삶의 현장 같아 안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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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느에 이어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수상 소감이 연일 화제다. 그가 남긴 어록들에는 무엇하나 뺄 것 없이 멋진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러 번 곱씹고 명심해야 할 빛나는 구절들이 많다. 개중에 나는 JTBC 손석희 사장과의 인터뷰가 참 인상적이었다.

“깐느는 지나간 얘기다. 상을 받는 당일은 마음껏 즐겼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다음날 귀국 후부터는 다음 작품 시나리오를 썼다.”


하도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바닷길 한 바퀴 250km를 돌며 키로 당 만 원씩 기부하는 제주 일주 기부 여행. 도전했고, 성취했으며, 하루 동안 나는 꽤 취해 있었다. 인스타를 통해 여행을 지켜보던 이들과 소통하고 응원해준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날 저녁, 가장 애정 하는 제주 흑돼지 두루치기 맛집 <하도댁> 사장님께서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었다. 수고한 촬리와 라니와 함께 최고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최고로 기분 좋게 술도 마셨다. 그러나, 우리는 메달과 트로피는 만들지 않고, 다음날 바로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와 글을 쓰고, 노래를 짓고, 밤에는 사랑을 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괴롭지만 즐겁게 해낼 때, 과정에서의 괴로움은 결국 즐거움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몸으로 배웠다. 손끝이 저리고 성가신 근육통과 함께 잠자리에 든다. 아 이건 정말 기분 좋은 괴로움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제주 바닷길 한 바퀴 250km, 키로 당 만 원씩 기부하여 모은 버마난민음악학교 장학금 2,500,000원. 벌써부터 내년에는 또 무엇을 타고 제주일주 여행을 할까 즐겁게 고민하며 사바아사나, 죽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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