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27일.
혜지는 곧 결혼을 한다. 은지는 제부 될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소개한 것도 아니다. 혜지에게는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고아 정혜지'로 결혼을 할 작정인 것 같다. 은지는 혜지에게 결혼 준비에 보태라고 3천만 원을 건넸다. 기계처럼 돈을 받아 든 혜지에게서 은지는 어떠한 인사도 받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서운할 수도 있는 일인데 서운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신기하다. 같이 산지 삼십오 년 만에 독립하는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다. 그 후로 결혼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일절 묻지도 않고, 혜지는 은지에게 알리지도 않는다. 다음 달, 은지는 날짜와 시간에 맞춰 참석만 하면 된다. 상견례도 없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로 아주 간소화된 결혼식이다.
은지는 출판사에서 받은 원고의 교정 작업을 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연신 들이켠다. 건조한 커피 향과 시원함을 가장한 소름 돋는 차가움, 그리고 집중하기 위해 필요한 적당한 카페인이 몸에 흡수된다. 작업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거실의 벽걸이 시계를 본다. 11시 15분. 혜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걱정이 되지만 걱정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문자를 보내지도 않고, 전화도 하지 않는다. 밤 11시 40분이 넘어가면 들어올 것이다. 요새 일주일 넘게 계속 그렇다.
인어다리를 하고 작업을 했던 자세에서 아빠 다리로 바꿔본다.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참아내느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팔을 들어 양쪽 옆으로 스트레칭을 해본다. 아직 작업할 양이 많이 남았는데도 집중이 되지 않는 건 혜지 때문인지, 전 남자 친구 때문인지, 오늘 느꼈던 나의 새로운 감정에 대한 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한낱 같은 희망 때문인지 고를 수가 없다. 무덤덤하게 상황을 대면하며 감정의 소용돌이 없이 현실에 집중해왔던 그동안의 은지와는 다른 모습을 오늘 뜻하지 않게 마주했다. 이깟 일로 심장이 두근거리면 안 된다는 별 볼 일 없는 자존심도 꿈틀대는 것 같다. 그러나 '난, 살아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미소가 또다시 번진다. 미소라는 건 억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쉬운 가면인데, 오늘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미소가 생겼다. 선물처럼.
누군가가 도어록 버튼을 누른다. 비밀번호는 정확하게 6자리임에도 5자리를 누르며 오류를 낸다.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은 혜지밖에 없는데 도어록을 문질러대는 낯선 이의 손길이 느껴져 은지는 얼굴이 굳는다. 거실 불을 끄고 몸을 굽혀 살금살금 주방으로 기어간다. 은지는 식칼 하나를 빼어 들고 문을 향해 섰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간에 주먹구구식으로 덤벼들 작정이다. 두어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문이 열린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겨우 발을 내딛는 혜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방도 없고 구두 한 짝도 없이 엉망이 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서 있다.
"...?!"
칼을 식탁에 내려놓고 성큼 달려가 혜지를 부축해 안으로 이끈다. 혜지는 말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서 있는 것 자체로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누군가에게 구타당한 얼굴은 안쓰럽게 부어있다. 흰색 블라우스에는 검붉은 피가 여기저기 뚝뚝 묻었다. 혜지는 은지에게 안긴 채 그대로 쓰러져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