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없는 사랑 #4

by Cruel Ella

은지의 떨리는 손끝이 카페 문 손잡이를 향한다. 지금 은지의 시야에는 모든 것이 슬로 모션이다. 버틸 수 있는 마지막 힘이 빠르게 소진되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낄 만큼 힘에 부친다. 전 남자 친구는 은지의 그 가녀린 몸에 너무 과한 타격을 주고 떠났다. 받아낼 수 없는 충격을 안겨놓고 거칠게 가버린 전 남자 친구에게 화도 나지 않는다. 은지는 그런 여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스로 일어섰다. 도움 없이 바로 서기란 나이가 들수록 비참해진다. 은지의 몰골은 참담하다. 과연 이 커다란 유리문을 열 수 있을지 자신감마저 없어질 때 뒤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어준다. 그것도 배려하듯 천천히. 그리고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그만 이런 말을 내뱉고야 만다.


"아, 감사합니다."


처음이었다. 정확히 처음 느꼈다. 은지의 필요에 의한 배려가 시기적절하게 맞아떨어져 마음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뇌에서 문장을 만들고, 입을 벌린 채 성대를 울려 음성으로 입밖에 꺼내어진 것이다. 어질 했던 순간, 쓰러질 것 같은 정신을 가까스로 붙들고 서서 걸어가던 참이었다. 커다란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아찔해 보일만큼 힘들었는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적절히 문을 열어준 것이다. 은지에게는 아주 정확하게 감사한 일이었다.


이렇게 사는 거였는데 왜 못살았을까. 이런 게 평범함이고 사람 간의 오가는 배려일 텐데 왜 어려웠을까. 순간 많은 생각을 하느라 도와준 분을 향해 돌아보지 못한 걸 후회하며 은지는 차에 시동을 건다. 나의 감사한 말이 너무 작은 소리로 내뱉어져 상대가 못 들었다 하면 실망할 것만 같았다. 은지는 운전석에 앉아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 야외 주차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본다. 다양하지만 다양하지 않은, 생긴 대로 지어진 표정에서 나오는 행복감은 어느 누구에게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저 중에 한 분이었을까. 제대로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나에게 그런 배려를 주는 사람도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인 걸까?


'다들 그냥 그렇게 사는 건가? 혼자서는 웃을 수도 없는 인생인 거야? 원래 그래?'


은지는 용을 쓰며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나름 대학 행정일은 안정적인 직업이기도 하고 크게 어려운 일이 없어서 착실히 잘 다니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한 일일 수 있지만 은지에게는 더없이 좋은 직장이다. 적당한 기일이 되면 따박따박 입금되는 월급이 있고, 수익을 내기 위한 압박도 없고, 학생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다지 불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혜지를 위해서는 조금 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은지는 개인적으로 출판사의 교재 교정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돈은 아니지만 재택으로 일하기 좋은 알바인 셈이다. 잠들기 전 혹은 주말에 몇 시간만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아르바이트비가 입금된다. 그다지 어려운 교정도 아니다. 은지는 의미 없는 열정을 쓰레기 같은 인생에 바치고 있는 중이다.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집으로 돌아가면 교정해야 할 교재가 산더미다. 오늘은 일요일, 오늘 밤까지는 교정을 완료해서 보내줘야 월요일에는 출판사에서 확인 후 다음 작업에 들어간다. 마음이 급해짐과 동시에 엑셀에 올린 발에 힘이 준다.


이유 없는 미소가 지어진다. 은지에게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오늘부터는 행복이란 것이 동반되는 인생이 가능해질 것만 같다. 한 번의 경험으로 몇 시간을 미소 지으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가능한 많이 경험하고 싶다.


행복이란 건 찾아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알 수 있는 것이라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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