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없는 사랑 #6

by Cruel Ella

지목할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 있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지만 지금의 상태에서는 혜지의 몸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게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은지는 가만히 앉아 있다. 머리를 굴려 생각이란 것을 해 본다. 무슨 일인지 물어도 혜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대답이 나올만한 사람을 찾아가 봐야 하는데 아는 정보가 없다. 핸드폰부터 뒤져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혜지는 오늘 가지고 나갔던 가방을 들고 오지 못했다. 신발장에는 피 묻은 구두 한 짝만 널브러진 채 놓여있다.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지만 과연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가 없다. 설사 어떤 큰 일이라 한들 은지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진 못할 것이다. 세상에는 별의 별일이 많고 그 주인공이 은지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살면서 쭉 해온 터. '불행'과 '별일'은 이미 은지 인생에 많았었다. 덤덤히 겪여 쌓아 온 내공이 은지 안에 가득하다. 어렸을 적에는 불행 투성이 인생에 대해 스스로 연민을 만들어 다독이면 그런대로 살아졌다. 그러나 그건 그냥 살아내기 위한 은지만의 방법이었을 뿐 어느 누구도 은지에게 관심을 두거나 괜찮은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던 시절이 지나고 어른이 된 서른다섯의 지금도 은지는 혼자다. 그리고 어떻게든 겪어내긴 할 텐데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는 삶이지만 가루처럼 부서져버리는 것은 두렵다. 우선 지금은 혜지가 살아서 집에 들어온 것에 안심을 해 본다.


혜지를 침대에 눕히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 이곳저곳을 닦는다. 옷을 벗긴 후 상처가 아프지 않게 꾹꾹 눌러 피를 닦아내니 뽀얀 피부가 창백해 보일 정도로 하얗게 드러난다. 얼굴과 어깨, 손목과 손바닥에도 상처가 있다. 헝클어진 머리는 많이 뽑혀서 침대 주변에 머리카락이 떨어지고, 넘어졌었는지 양 무릎도 까였다. 구두 한 짝은 어디 있을까.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을 발바닥에는 끈적이는 온갖 오물이 묻어있다.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혜지는 신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은지는 한참 동안 혜지를 바라본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일을 신경 쓴다고 싫어할까. 가족이라는 것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일에 서로 의지하며 극복해 갈 수 있는 사람들인 건데, 혜지에게는 그런 의지가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은지는 지금껏 혜지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거기에 대한 복수를 해줄 기회인 듯싶지만 내버려 두면 옆에 둘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없어져버리게 된다. 내버려 둔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여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럼 다시 변함없는 일상이 시작되겠지. 하지만 이번엔 다른 선택이 하고 싶어 졌다. 혜지도 은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고마워.'


그런 희망을 안고 살아가 보자. 내가 뜻하지 않은 순간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 것처럼. 혜지에게도 그런 기회를 줘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하고 싶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만의 최면을 건다. 35년의 인생은 짧았다고, 다양한 행복의 순간들을 맞이하기엔 짧은 인생이어서 느낄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고 은지는 생각한다. 그러면 오늘도, 내일 하루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날 것 같으니까. 힘이 나야 몸을 움직일 수 있고, 움직여야 배가 고파지고, 배고프면 먹으면서 나를 채워간다. 별거 없는 병리학적인 순환인데도 그게 살아있는 거다.


새벽 6시 30분.


출근을 해야 한다. 어김없이 흘러가는 시간 흐름에 인간은 곁을 내어줄 수밖에 없다. 멈출 수도, 잡아 내릴 수도 없는 것이 시간이다. 동이 트는 새벽빛이 창문을 건너온다. 아직 푸르스름한 빛 가운데 새벽이라는 공기가 양 귓불에 붉은빛으로 차갑게 내려앉는다. 간단히 미음을 끓여놓고, 따뜻한 보리차를 물통에 담아 세팅한 후 대문을 나선다. 어떠한 메모도 남기지 않은 것은 역시 은지답다. 혜지는 깨어나는 대로 알아서 잘 챙겨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은지가 해준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떠한 인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이 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출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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