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했다. 오늘 서류 작업이 많았어서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사실 서류 작업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은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약국에 들러 소염진통제와 쌍화탕을 산다. 일을 하면서도 혜지의 상태가 궁금했지만 연락 한 번 해보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혹시 열이라도 올랐으면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하는데, 혜지에게서 어떠한 연락을 받질 못했다. '걱정'이라는 단어를 쓰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이 쓰이고 염려의 감정이 드는데 표현하지 않으니 진짜 '걱정'인 건지 확신하기 어렵다. 원래 무덤덤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은지는 그렇게 살기에 남들보다는 더 최적화된 성격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재촉하는 발걸음을 멈칫, 큰 그림자 하나가 집 앞에 서 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건조한 나무처럼 인간의 결이 느껴지지 않는 한 남자가 은지 시야에 들어온다.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구두 한 짝과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혜지의 약혼자이다. 생사를 확인하러 온 것인지 사과를 하러 온 것인지 은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정보가 없어 연락을 취할 수 없었던 사람이 제 발로 집까지 찾아와 있으니 은지는 이 남자에 대한 망설임 없이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어 그 남자를 겨냥해 힘껏 던진다.
"뭐야? 돌았어? 이 썅년아!"
보통 사람 같으면 어안이 벙벙하니 도망가거나 왜 그러시냐고 물을 만도 한데, 곧장 욕이 튀어나온다. 사람의 됨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도대체가 이 쌍둥이 자매에게는 제대로 된 남자가 붙질 않는다. 은지는 이 남자가 어떤류의 인간인지 감을 잡고 더 큰 돌멩이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두운 밤이라 남자는 은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한 여자의 행패처럼 느껴졌나 본데, 가로등 밑을 지나며 그 빛에 비친 혜지와 같은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고 짐을 던져둔 채 그대로 달아나버린다.
짧은 머리를 한 독기 품은 표정의 쌍둥이 언니.
어쩌면 그동안 은지가 들었던 욕의 저장 공간은 얼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감정의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어버린 거라고, 그것은 은지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삶의 애환이었다. 자연스럽게 웃을 수도 없고, 서러워도 마음껏 울 수 없는 수분이 빠져나가버린 건조한 인간. 로봇이 될 수 없어서 슬픈 인간이 은지 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은지에게 표정이란 것이 생긴다. 온화하지 못한 찌그러지고 험상궂은 비대칭 표정의 얼굴, 그 위에 덧입혀진 싸늘함.
내팽개쳐진 구두와 가방을 주섬주섬 손으로 끌어 모은다. 긁히고 더러워진 짐짝처럼 혜지의 결혼도 이렇게 버려지게 된 거겠지. 행복해지려 애를 쓰고 정성을 다 했는데도 잘못한 것 없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한 채 버려진 혜지다. 사랑해달라고 너무 구걸을 해댔을까, 사랑을 확인하려고 집착을 했던 걸까. 아니면 은지처럼 퍼주기만 하다가 내버려진 감정 쓰레기통 같은 연애였을까. 어떤 이유에서든 결론은 버려졌다. 부정할 수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