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지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아버지와 닮았다던 창백한 여자가 보인다. 아마도 아버지의 눈썹은 더 진할 테고 코는 뭉툭하니 더 크겠지. 피부는 은지보다 더 까맣겠지만 남자치고는 뽀얀 살이 매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문질러본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턱선이 아주 예쁘다. 백옥 같은 피부에 립스틱만 살짝 발라도 금세 화사해진다. 쌍꺼풀은 없지만 눈망울은 크게 자리 잡았다. 여기에 머리카락까지 길게 늘어뜨리면 영락없는 절세미인이다. 혜지가 그렇다. 혜지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를 염두에 두고 보아도 20대 중반처럼 아름답다. 은지는 짧은 머리를 괜스레 만지작 거린다. 괜히 잘랐다는 후회가 든다. 아마도 그 남자를 마주친 이후 생긴 감정이다.
감정.
국어사전에는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하여 느끼어 나타나는 심정이나 기분'이라고 정의한다. 은지 인생에 감정이라는 것이 예고 없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일상에서 다양한 기분을 느끼게 되고, 생각의 회로가 바뀌었다. 거울만 보면 아버지 생각으로 괴로워했던 은지가 본연의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스스로를 발견하자 부끄러워졌다. 낯설다. 거울을 벗어나 몸을 움직여 빠르게 욕실을 정리하고 나온다.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오늘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 야채죽을 만들어 보리차와 함께 혜지 방에 넣어준다. 냄비에 남은 죽은 주방에 선채로 은지 입속으로 욱여넣는다. 맛과 향을 느낄 새 없이 다섯 숟가락으로 끝이 난다. 적은 양이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곁들이면 2~3시간 동안 원고 작업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득, 미소가 올라온다. 아무 생각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남자 얼굴이 떠오르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조절되지 않아 당황스럽지만 어쩌면 이런 게 살아있다는 증표가 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생각과 감정, 기분과 표현의 회로가 은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이성은 건너뛰었다 하더라도 '은지다움'이란 것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마법이다.
"뭐지? 내가 왜 이래~ 미쳤나 봐."
생전 하지도 않던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열려 있던 방 안에서 혜지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혜지도 아픈 현실 속에서 빠져나온다. 은지답지 않은 은지 때문이다. 은지와 혜지는 눈이 마주친다. 서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나를 보는 것과 같은 쌍둥이만의 느낌이 있다. 상대의 표정이 본인의 표정이 되는 거다. 10초 이상의 껌뻑거림의 찰나를 지나 혜지가 먼저 웃음을 터뜨린다. 실성한 여자처럼 웃음을 토해낸다. 그동안 시체처럼 나락에 빠져있던 혜지가 웃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큰 소리로. 모습 그대로를 표현하자면 배꼽을 잡고 옆으로 쓰러져 깔깔거리며 웃는다. 은지는 냄비와 숟가락을 든 채로 혜지의 모습을 본다.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어둑하고 차가운 저녁 기운이 복숭아빛 온기로 바뀌는 경험을 해본다. 움직이는 공기 속에서 소리가 요동친다. 익숙한 집에서의 낯선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