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 없는 사랑 #8

by Cruel Ella

금요일 오후.


퇴근을 한 시간 앞두고 있다. 내일은 온종일 쉴 수 있는 날이지만 은지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날이다. 아르바이트에 아픈 혜지까지 돌보려면 체력을 잘 비축해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먹는 일에 관한 것마저 소극적인 은지이지만 혜지를 보살피려면 우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그래서 은지는 음식을 먹을 때 우걱우걱 소리가 나나보다. 대학은 시즌별로 하는 일이 추가된다. 결국 한가한 날이 별로 없단 얘기다. 매년 졸업과 입학이 있고, 매 학기 수강신청과 휴학에 관한 문의전화가 빗발친다. '신의 직장'이라고는 하지만 버텨내는 강도를 보면 다른 기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도 은지에게는 이 정도의 고단함은 익숙하다. 이미 이것 말고도 다른 일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지는 많이 회복되었다. 몸에 난 상처보다 마음에 상처가 깊어 보인다. 5일째, 하루에 한 번 미음만 먹는다. 다른 과일과 간식을 사다 두어도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썩어간다. 은지는 원래 간식을 먹지 않는다. 부은 얼굴은 완전히 가라앉았고, 얼굴과 어깨에 있는 멍 자국만 선명히 남아있다. 상처는 제법 아물어서 딱지가 떨어질 지경이고, 구두와 가방은 이미 버렸다. 딱지가 떨어지면 새 살이 보일 테지만 혜지의 삶에는 새 살이 돋아날지 모르겠다. 아마도 한동안 좁은 집에 처박혀 TV나 보겠지만 은지 입장에서는 이마저도 다행이다. 움직여 주지 않으면 돈이 들지 않는다. 소리 지르지 않으면 싸울 일이 없다. 혜지와 은지는 그렇게 상처를 치료해가고 있는 중이다.


치료가 되긴 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뭉개지는 걸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제 자리에 멈춰 선 채 존재하고 있는 것뿐인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 살아지는 것이고, 울지 않으면 버텨볼 만한 것이라 여겨진다. 돌덩이처럼 굳어진 혜지의 마음과 몸은 좀처럼 유연해지지 않는다. 긴장의 연속과는 다른 단단함이다. 아마도 인간에게 있다던 혼이 빠져나간 듯 혜지의 눈에는 초점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몸에 음식이 들어가질 않으니 더 말랐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숨을 쉬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감는 의미 없는 행위만 하고 있다. 떠다니는 먼지에 닿을까, 멈춰버린 공기에 먹힐까, 그저 내뱉어지는 이산화탄소에 질식되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은지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복사된 서류를 정리하고 가방을 들고 일어선다. 다른 동료들에게 인사 따위 안 한 지 오래다.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고 알아서 퇴근한다. 어쩌면 은지 때문에 생긴 팀 문화일지도 모른다. 로봇들의 온오프 같다. 사무실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었는데 밖에서 문이 열린다. 누군가 들어오겠구나 싶어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살짝 비켜섰는데 아무도 없다. 은지는 천천히 고개를 든다. 열린 문을 잡은 채 우둑커니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익숙한 향이다. 어디선가...!!


"이제 퇴근하시나 봐요~"


그 남자다.


"아, 감사합니다."


그때와 같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은지의 조절력은 이미 상실되었다.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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