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미래를 위한 참고서일 뿐이다.
근래에 나를 많이 괴롭힌 것이 있었다.
바로 과거.
그 과거라는 건 얼마 전에 쓴 글과 이어지는 데 바로 이전 연애였다.
절절한 사랑에 대한 아픔이나 미련은 아니었고 사실상 분노와 의구심이 가장 컸다.
잘 살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 인간이 했던 거짓말들과 날 두고 했던 더러운 뒷 짓거리들이.
인생을 거짓말 쳐야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인생이 싫었다는 거였고 스스로가 싫었다는 의미니까 정말 하루하루 지옥인 사람을 만났구나 싶으면서도 내가 왜 굳이 그런 사람을 만나야했을까를 생각했다. 억울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왜 그런 인간을 만나서 나는 지금 속을 상해하고 슬퍼하고 있을까. 걔가 했던 짓들을 곱씹으면서 스스로를 왜 갉아먹고 있을까.
괴로웠다. 분노를 갖고 있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나는 심리상담을 받고 있다. 어떤 정신과적 어려움이 있기 보다는 박사과정에 오고 나서 번아웃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내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한 심리상담을 이용하고 있는데 상담 선생님에게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요즘 똑같이 지내요. 항상 바쁘고, 아직도 고갈 점수는 10점인 거 같아요. ㅋㅋㅋ 그래도 상담하면서 제 한계점을 인정하고 적당히 쉬어주고 있어서 나름 일상을 잘 보내고 있어요. 근데 (상담 선생님은 이미 내 이전 연애와 내용을 알고 계신다.) 그 사람이 했던 짓들이 가끔 떠오르더라고요. 문득 랩실 가는 버스에서 걔가 나한테 ~한다고 했던 날 사실 다른 이성을 만나서 ~ 했겠다. 라는 생각이 들거나, 집에 가는 길에 걔가 ~게 행동했던 게 사실 ~였겠다.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많이 괴로웠어요. 이별하고 진짜 후련했는데, 아직 회복되는 과정인가봐요."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런 괴로운 생각들이 들 때마다 버스에서 사람들 몰래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나서 이 이야기를 했다.
"인생에 가끔 어이없는 일들이 생겨요. 사실상 00씨는 그냥 똥을 밟은 거예요. 우리는 그 똥을 보고 깊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 똥은 그냥 똥인거죠."
사실 그때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안 들었다. 선생님이 마냥 가볍게 내 문제를 치부했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누구보다 내 이야기를 오랜기간 들어왔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한 번도 가볍게 상담에 임한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로 신뢰가 갔던 사람이기에. 그때는 그냥 똥..? 그런 큰 똥이있나? 진짜 개 큰 똥인데, 나는 거의 트럭에 치인 느낌인데 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점점 과거 연애의 아픔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점점 내가 의식적으로 잊어야하는구나, 노력해야하는 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결국 과거를 보내주는 건 내 의지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척 했었는데 이제는 마주해야했다.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과거를 지우고 싶어하지 않는다. 물론 20대 중반에는 가끔 '아 인생 리셋하고 다시 살고 싶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내 과거 잘못들이나 선택들이 떠오를 때면 말이다. 근데 인생은 돌아갈 수 없고, 주어진 인생도 나름 살만하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서 과거는 잊어야 하거나 모른척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내가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잊어선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 과거를 계속 곱씹는 것도 불건강하다는 것을 이번에 느낀다. 적당히 과거에서 취해야할 것은 취하고,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한다. 나는 이번 연애를 통해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런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는 지식이 생겼다. 헤어지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정신과적 장애에 대해 수없이 읽어보고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경험해보지 않았더라면 그런 지식을 갖고 있어도 몰랐을 수도 있기에 더 잘 파악하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울 수 없는 과거지만 얻은 것은 있었다. 내 과거는 거기서 끝내야 한다.
더 파고들어서 그 사람의 정신이 아니라 행동과 과거 상황에 대한 분석하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움이 된다면 하면 좋겠지만, 오히려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과거에 나와 만나면서 했던 인간 말종 짓들을 더 이상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 일들은 내 실수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이 연애에서 가져야 할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과 '신뢰해선 안 되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게 된 것이다. 거기서 끝.
과거에 얽매이다 보면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점점 잊혀지게 된다. 심지어 순전히 남의 도덕성 결여로 인한 사건이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그 인간이 했던 잘못된 짓들을 돌이켜보면서 분석을 했을 때 나는 걔를 만나기 전 온전했고 건강했던 나를 잊은 채 그 상황에 놓인 불쌍한 나만 바라봤다. 그래서 내가 더 비참하게 느껴졌고, 불쌍하게만 느껴졌다. 근데 점점 과거가 내 일상을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문득 나에게 상처준 과거를 곱씹을 필요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상담 선생님의 말이 이해가 갔다. 아, 진짜 똥이었구나! 내 인생에 어떠한 의미도 주지 않는, 단지 똥을 밟았을 때 '아 여기 똥 자주 있네, 이 길로 다니지 말아야겠다' 정도의 경험이었구나 싶었다. 내 인생의 근간이 흔들릴 필요는 없었다. 겨우 그 똥 때문에. 유툽에서 이리저리 영상을 보던 중 인상 깊었던 댓글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안나고 대충 우리가 똥을 밟았다고 해서 그 똥을 밟은 내 다리에게 뭐라고 하지는 않지 않냐. 그냥 그 똥을 닦아내고 똥이 있던 길로 안가면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온통 똥이라는 단어가 난무한 문장이었지만 그 문장만큼 통찰력 있었던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머리를 탁! 쳤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인간은 나에게 단지 닦아내고 다신 그 길로 가지 않으면 되는 똥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나 허무한가.. 똥이었다니.. 한편으로는 조금 웃기기도 하다. 제대로 똥 한 번 밟았다.
나를 위해 과거를 보내는 것도 내 몫이기에 이리저리 과거를 잘 보내주는 방법을 찾아보던 중 유툽에서 한 영상을 보았다. 미국 강연이었는데 한 남자가 과거와 현재에 대해 백미러와 앞유리를 비유해서 이야기 했다. 우리는 백미러만 보고 살면 사고가 난다고. 백미러는 내가 사고 나지 않기 위해 봐야하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가장 크게 집중해야하는 것은 당장 내 앞에 가장 크게 비추고 있는 앞유리라는 것. 그렇기에 우리에게 과거는 사고가 나지 않기 위해 가끔 바라보아야하는 것이며, 지금 내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영상을 보고 생각이 많이 정리됐다. 어찌됐든 난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는 힘이 없다. 단지 내가 같은 실수나 사건이 휘말리지 않도록 도와주는 참고서 같은 용일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정말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사랑해주려고 한 사람이었는데 너는 평생 나 같은 사람은 못 만나겠구나. 아니,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더라도 너는 못 알아보고 다시 놓치겠구나. 그리고 그렇게 살다가 혼자 쓸쓸히 늙어 죽겠구나.. 나는 앞으로도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거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 사랑을 하겠구나. 너가 어떻게 살던지 간에 상관없이 나는 잘 살겠구나.
이런 생각들로 정리가 되어가면서 분노보다는 측은지심이 그리고 내 앞으로에 대한 기대가 생기고 있다. 물론 이러다가 종종 빡칠 때도 있을 것이다. 앵간치 어이없는 똥이었어야지.. (후 .. ^^ ) 가끔 또 빡치면 여기와서 이리저리 글쓰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 어차피 그럴려고 시작한 공간이었다. 내 생각을 내 맘대로 배출할 수 있는 공간. 배출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더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적절히 배출해야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좋은 비유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나는 앞으로 나아갈거고 가끔 뒤돌아보고 싶을땐 뒤돌아보겠지만 지금처럼 자주는 안 볼 것 같다. 그리고 진짜로 만나면 어떻게 부실지 가끔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도 없이 그냥 편안하게 그 사람을 단지 불쌍하게 여기면서 살아갈 것 같다.
잘가~~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