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찌개의 경지에 도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by 임경미


먹는 경험이 풍부해질수록 느는 건, 어떤 게 국이고 어떤 게 찌개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이다. 같은 재료가 들어가는데 어떤 건 찌개라고 부르고 어떤 건 국이라 부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였을 때, 나는 주부가 되어 가스 불 앞에 서 있었고, 찌개를 끓을 땐 찌개를 끓이고 국을 끓이고 싶을 땐 국을 끓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먹은 게 있는데, 물만 잘 맞추면 돼!


그러나 찌개랍시고 끓인 음식이 국에 가까운 비주얼인 ‘대홍수 사태’를 몇 번 경험하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국을 국답게 찌개를 찌개답게 끓이는 건 내가 나답게 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기세등등했던 마음을 국밥 말아먹듯 말아먹은 뒤, 제법 요리에 소질 있다고 자부했던 나는 된장찌개 앞에서는 여지없이 하룻강아지가 되고 말았다.


본래 찌개란 국물을 바특하게 끓여내야 한다. 그러나 나는 10년째 된장찌개를 끓이겠다며 된장국을 끓이고, 김치찌개를 끓이겠다며 김칫국을 끓이고 있다. 이쯤되면 애당초 찌개를 끓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고개를 내민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요리하면서도 도통 내 마음을 모르겠다. 이번에도 역시 된장국이 된 찌개를 떠먹으며 되지도 않는 자위를 한다.


‘내 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거야.’


아, 뭐가 더 나은 위로일까. 죽어도 된장찌개를 끓이지 못하는 것과 끝내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이성은 전자라고 생각하지만 요리 경력 고작 10년차의 자존심은 자꾸 후자가 맞다고 우겨댄다.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다.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전형적인 된장찌개다. 단출한 재료가 들어간 게 다이지만 제법 찌개다운 면모를 과시한다. 두부, 감자, 양파, 버섯. 많이도 아닌 약간씩. 애호박도, 바지락도, 청양고추도 들어가지 않은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는 그럼에도 깊은 맛이 나고 구수하며 재료들에 된장의 맛이 배어 일품이다.


그날도 소고기의 느끼함을 잡는 데엔 된장찌개만 한 게 없다며 된장찌개를 끓이셨다.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맛있게 완성된 찌개를 한 숟가락 떠먹고는 개안한 사람처럼 미각의 눈이 번쩍 뜨인다. 이 된장찌개는 어깨너머로 배운 시어머니의 레시피대로 끓여봐도 절대 맞춰본 적 없는 환상의 비율이고, 제대로 배우고 다시 끓여도 따라 할 수 없었던 노하우의 집합체다.


여기서 드는 의문.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는 왜 국물이 적어도 짜지 않을까.


나는 된장찌개를 찌개처럼 끓이기 위해 온갖 시도를 했다.

자고로 찌개란 진하고 적은 국물이지. 이런 마음으로 된장찌개와 비슷한 색을 내려 된장을 풀면 소태가 되었고, 짠맛을 없애기 위해 물을 넣으면 그야말로 한~강이 되고 말핬다. 국을 찌개로 만들기 위해 재료를 몽땅 집어넣으면 일주일은 먹어도 충분한 양이 되고 마는 불상사까지.

그러나 몇 번의 시도에도 아직 물과 된장과 재료의 환상적인 조합을 발견하지 못하고, 나는 여전히 된장찌개로 시작해서 된장국으로 완성되는 쿠킹 라이프를 살고 있다.




이대로 영영 된장국만 끓일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된장찌개를 끓일 것인가. 문득 맞이한 선택의 기로에서 물에 된장 풀고 각종 재료 넣은 건데 된장국이든, 된장찌개든 뭣이 그리 중요허냐며 내 안의 마음 넉넉한 자아가 조용히 나를 구슬린다. 하지만 오기 좀 부리는 자아는 괜히 찌개와 국이 따로 있겠냐며 언젠가는 제대로 된 된장찌개를 끓일 수 있도록 계속 시도하라고 발끈한다.


그러고 보니 된장찌개처럼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한 게 인생이다. 수두룩 한 것 중 어떤 건 포기했고, 어떤 건 극복했고, 어떤 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미극복 리스트에 기록되어 있다.

통장 잔고 얼마 모으기, 어느 출판사에서 책 내기, 비즈니스 클래스 타고 여행 가기, 발끈하지 않기, 야식 줄이기, 엄마한테 성질부리지 않기, 지혜로운 사람 되기, 하수구 효과적으로 뚫는 법 찾기 등등.

이런 버킷 리스트인지 인생의 소망인지 쓸모없는 집착인지 헷갈리는 것들이 내게는 산더미처럼, 숙제처럼 놓여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사는 것도 벅찬데,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된장찌개까지 리스트에 넣어두고 나를 달달 볶아야 하는 걸까.


어제는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는 남편의 말에 각종 재료들을 샀고, 나는 가까운 날 다시 된장국인지 된장찌갠지 모를 것을 만들어 낼 것이다. 된장국도, 된장찌개도 아닌, 찌개와 국 중간쯤의 ‘된장찌국’의 음식을 완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몇 번쯤인가 애매모호 한 것들을 만들어내면 언젠가는 문득 시어머니의 된장찌개 같은 된장찌개를 끓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할 수 있게 되리라는 바람을 저버리지 않은 채, 계속 시도해보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오늘도 된장 무언가를 끓이고, 그렇게 하루를 살고 있다. 어쩌면 시어머니의 된장찌개도 된장국일 때가 있었을 것이라는 발칙한 위로도 하면서.


삶도, 요리도 점점 익숙해지기 마련이니까.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면 뭐든 자연스럽게 될 수 있겠지.



(이미지 제공: 픽사베이, jyleen21)



keyword
이전 04화김장김치, 마음이 맛있게 익어가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