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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무침, 그리움을 미리 채우는 시간

by 임경미


창밖은 이미 밤이 위용을 부리는 늦은 밤. 금요일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결국 억눌러놓은 식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달어플을 켜고 말았다. 저 돋보기를 누르면 맛있는 굴보쌈 맛집이 마법처럼 나타나길 바라며, 부디 이 야심한 시간까지도 배달의 민족의 후예답게 먹는 것의 은혜를 베풀고 있는 가게가 있길 바라며.

찾았다, 굴보쌈!

비록 굴 무침은 아니어도 비슷한 맛이라도 나겠지. 하지만 이렇게 야심한 시간엔 안된다며 간신히 이성이 작동한 덕에 그날 밤, 지독한 굴 무침으로부터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었다.


굴 무침이 언제부터 이렇게 먹기 힘든 음식이 되었던가. 11월의 가을바람이 점점 추워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굴구이를 먹으러 갔고, 돌아오는 길엔 깐 굴 한 상자를 사서 초장에 찍어 먹고, 굴밥에 굴무국에 굴 넣은 라면과 떡국까지 끓여 먹어도 굴이 남아서 굴 무침에 굴전까지 만들어 먹지 않았던가.

굴을 이리 맛보고 저리 맛보면서도 생굴을 먹는 것은 조금 난도가 높았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굴 무침을 해주실 때면 며칠 동안 절반가량 꺼내 먹은 뒤로는 끝을 보기 어려운 반찬이었다.


그런데 선호도 낮았던 굴 무침이, TV 속 연예인들 몇 명이 아삭거리는 배추 위에 수육과 굴 무침을 먹는 모습을 보자마자 선호도가 급상승하며 그날부터 ‘굴 무침’ 노래를 부르며 굴 무침을 찾고 있다.

흡사 파블로프의 개가 된 듯 (침을 흘리지는 않고) 입을 벌리며 보고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한다.


“굴 무침 먹고 싶다! 여보도 먹고 싶지?”

“응, 먹고 싶지!”(당연한 것 좀 묻지 마. 나는 지금 눈으로 먹는 중이니까.)

집중해 있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 남편은 또 말을 잇는다.

“내가 굴 무침을 먹어본 적이 있던가? 맛있겠다. 먹어보고 싶어.”


그동안 미처 입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개수대 구멍으로 향한 굴 무침들이 화들짝 놀라 찾아올만한 발언이다. 생굴 싫어한다며 매번 젓가락 한두 번 가지고 가지는 게 끝이었고, 먹으라고 사정사정해도 먹지 않았던 양반이 이 무슨 망발이냐고요.


“우리 결혼한 뒤로 장모님께서 매년 굴 무침 해주셨는데 무슨 소리야. 여보나 나나 생굴 싫어해서 하도 안 먹은 바람에 오래돼서 못 먹고 버린 적도 있거든.”


오래돼서 못 먹고 버린 적도 있거든.


이 말을 뱉고 나니 지금 굴 무침, 굴 무침 하며 굴 무침을 찾고 있는 나의 이중성을 어찌해야 할지. 후에 밀려오는 죄송함은 두번 말하면 입 아프고.


사실 지금이라도 식당 같은 거 찾지 않아도 될 터였다.

“엄마, 굴 무침 먹고 싶어. 만들어줘요.”


이 말 한마디 내뱉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러면 나는 손 쉽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굴 무침을 얻을 수 있을테니. 하지만 그 손쉬운 걸 왜 할 수 없어 어플을 켜고 굴 무침을 찾고 있을까.

그 이유란, 말을 입밖으로 꺼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불 보듯 뻔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선 굴 무침을 해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른 시간 일어나 찬바람 맞으며 장을 볼 것이고, 무거운 짐을 양손 가득 들고 버스를 탈 것이고, 굴을 손질하고 굴 무침을 만드시느라 또 한동안 부엌에서 나오질 못할 것이고, 아이스박스에 포장해서 넣은 뒤 택배를 보내러 다시 외출을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엄마의 하루는 굴 무침만을 위한 하루가 될 것이 분명했다. 손은 차가운 물의 온도에 빨갛게 굳고, 허리와 목은 더 뻐근해지면서 말이다.



아쉬우니 눈으로나마 굴 요리 맛보는 중




엄마만큼은 아니지만, 이 나이가 되어 보니 반찬 하나 만들면 손목이 아프고, 반찬 두 개 만들면 목이 아프고, 반찬 세 개 만들면 허리와 어깨까지 아프다. 반찬 하나 만들어내는 티 나지 않는 그 수고로움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반찬 하나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뭐야, 너무 짜.” “나 이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밥 생각 없어. 안 먹을래.”


너무나 쉽게 내뱉었던 외면의 말들.

이 말을 들으며 내심 서운했을 마음도 이만큼 나이를 들어보니 알았고, 어머니의 키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며 그동안 다 먹지 못해 반찬을 버렸던 내가 밉고, 그 반찬들이 아까워졌다. 그래서 이젠 반찬을 버릴 수가 없고, 반찬 하나 만들어 달라는 말도 무게가 더해져서 조심스러워진다.


굴 무침, 그 작은 것 하나를 입안에 넣기 위해 감내해야 할 수고의 크기를 굴 무침 한 조각을 통해 얻는 유희와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이미 이런저런 마음을 느껴버린 지금은, 그런 말을 하려면 염치 따윈 모르는 사람처럼, 철이란 건 들지 않은 사람처럼, 나사 하나쯤 풀린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 한 마디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밀려오는 속상함. 앞으로 살날이 창창한데, 안 먹었으면 모를까 이미 먹어버려서 그 맛을 알아버린 음식이 먹고 싶어질 땐 어찌해야 할까. 요즘처럼 유난히 굴 무침이 먹고 싶고, 꼬막무침이 먹고 싶어지는 날엔 무엇으로 그 허기를 달래야 할까. 언젠가 찾아올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서 결국 타협. 더 늦기 전에 미리 먹어두자며, 기회가 있을 때 더 먹어두자며 염치 불고하고 굴 무침을 해달라고, 이왕이면 꼬막무침도 함께 해달라고 말씀드려볼까.


“엄마, 있잖아. 내가 아무리 흉내를 내봐도 엄마가 한 것처럼 맛이 안 난다니까!

반찬가게에서 사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엄마표 굴 무침이 먹고 싶다!

그리고 엄마 사위는 장모님표 꼬막무침이 먹고 싶대. 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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