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 편

by 최열음

이제 크로아티아에서 한 달을 보낸 후, 동유럽을 돌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크로아티아와 가장 가까운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입니다. 야간버스를 타고 류블랴나에 도착했는데요. 처음 도착하자마자 도시스러운 분위기에 폭 빠져버렸어요. 크로아티아에는 없던 것들이 슬로베니아에는 많았습니다. 물론 그 반대이기도 하겠죠. 확실한 건 슬로베니아에서 아주 많은 커피를 마셨다는 것입니다.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빵을 사 먹는 건 조금 잊어버렸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진을 보니 온통 커피뿐이더라구요. 그것도 스페셜티 커피로요.


사실 류블랴나를 시작으로 커피 맛집들을 더 열정적으로 찾아다닌 것 같아요. 커피 트럭 같은 곳도 있었는데, 마끼아또를 한번 먹어보고 감격했거든요. 이탈리아 이후로 라떼에 다시 빠지기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고운 우유 폼을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리고 어느 카페든 손님이 꽤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여유로웠어요. 우리나라 카페들을 생각해 보면 분주함과 친절함이 함께 가기 어려운데, 여기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고 있더라고요. 회전율을 높이는 것보다 맛있는 커피 한잔을 완성하는 게 더 중요해 보였어요.


Tri Marije Coffee Trailer


첫 커피를 먹고 반했던 그 트럭입니다. 트럭 속 건실한 청년이 조용하게 커피를 말아줍니다. 저는 마끼아또와 플랫화이트 중에 고민했는데, 둘 다 가격이 꽤 나가서 그나마 양이 적고 저렴한 마끼아또를 선택했어요. 저 종이컵에 주는 커피는 웬만하면 다 맛있더라구요? 조금 근거 없는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맛집들이 쓰는 컵인 것 같아요. 구글맵에 이 커피 트럭이 뜬 걸 봐서는 아마 이 자리를 항상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너무 깔끔하고 아담하고 일하기도 좋을 것 같았어요. 제가 만든다면 이만큼 맛있는 라떼를 말아주지는 못하겠지만요.



저희가 류블랴나에 도착했을 즈음이 노동절 휴일이었어요. 5월 초였거든요. 우리나라로 치면 5/1 근로자의 날입니다. 우리는 휴일임에도 쉴 수 있으면 감사한 느낌인데, 유럽에서는 아주 대대적인 휴일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식료품도 미리 다 사놔야 했어요. 안 그래도 일요일에 다 문을 닫는데, 다음날이 노동절이라서 정말 물을 살 곳도 없더라고요. 저희는 커피를 먹고 공원에 갔다가, 주민들에게 물어 물어 주유소에 있는 식료품점에 다녀왔어요. 꽤 다사다난했지만 맛있는 커피를 원동력 삼아 그리 피곤하지 않은 마음일 수 있었어요.


어제 친구하고 산책을 하다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커피 그 자체가 필요하다기보다는 커피를 소비하는 그 행위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요. 새 일을 시작하거나 다시 움직일 힘을 그렇게 얻는 것 같아요. 물론 정말 맛있어서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요.


stow 2 go coffee shop


어쩐지 저희에게 류블랴나는 연휴이기도 하고 비가 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내를 구경하기보다는 근교에 있는 블래드 호수에 다녀오기로 했어요. 알프스 산 꼭지를 볼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물론 날이 좋으면 훨씬 아름답겠지만 저희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요. 비 오는 블래드라도 보고 싶어서 다녀왔어요. 그전에 커피는 한 잔 마시고 싶어서 테이크아웃을 하기로 하고요.


한국에서는 커피를 테이크아웃할 만큼 애정을 쏟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더라도 저렴한 메가커피 정도였는데, 요전날 트럭에서 먹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비싼 커피라도 가져가고 싶었어요. 이곳은 구글맵에 찜해두고 벼르고 있던 카페인데요. 라떼아트가 기가 막혀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인 언니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간간이 주민들과 스몰 토크도 하면서요.



그렇게 만들어준 커피가 주인장 마음에는 별로 들지 않았나 봅니다. 허락을 받고 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라떼 아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더라고요. 폼이 좀 거칠기는 했습니다. 작게 로제타를 그려줬는데 그래도 저는 맛있게 먹었어요. 저번에 갔던 커피 트럭이 조금 더 맛있었다는 생각은 했지만요. 그래도 아침부터 줄을 서서 커피를 사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되게 행복했거든요.


Confectionery Zima


어쩌면 이게 슬로베니아에서 먹은 유일한 빵일지도 모르겠어요. 블래드 근처 카페에서 먹은 것인데요. 크렘 레지나라는 케이크입니다. 위아래로 누네띠네 같은 얇은 패스트리가 덮여있고 안에는 두 층의 크림이 있어요. 커스터드와 생크림 같았어요. 빵은 없고 크림만 있어서 조금 당황했지만 별로 느끼하지는 않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케이크를 먹으러 온다고 들었습니다. 비가 와서 추운 블래드 호수를 등지고 이 케이크를 먹은 후에 숙소로 돌아왔어요. 돌아오면서는 비빔밥을 포장해 가자는 야무진 계획을 세웠고요. 사실은 조금 느끼했던 걸까요. 모든 건 비빔밥을 먹기 위한 빌드업일 뿐이었을지도 몰라요.


kavarna moderna


휴일에도 문을 여는 카페가 있긴 했습니다. 저는 글을 쓰고 읽으며 쉬고 싶어서 카공을 계획했어요. 아마 류블랴나 젊은이들은 다 이곳에 와있는 것 같았습니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 그런지 학생들이 더 많아 보였어요. 국립미술관 지하에 있는 카페였는데 그래서 더 운치가 있었어요. 비 오는 날이라 꽤 습했는데도 이곳은 쾌적했습니다. 뭐라도 꺼내서 더 오래 앉아있고 싶은 느낌이 드는 카페였어요. 이 공간에 오자마자 정말 카페를 잘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맛보다도 공간에 폭 빠졌던 곳입니다.



음료는 라떼를 골랐어요. 오트 우유였는지 라이스 우유였는지 기억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밍밍한 미숫가루 맛 같았어요. 음료가 엄청 맛있지는 않아서 조금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이 근처에서 지낸다면 자주 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류블랴나에서는 소소하게 많은 것들을 한 것 같아요. 하루를 통으로 비워서 카공을 하기도 하고, 별다른 계획 없이 거리를 걷기도 했습니다. 그런 유유자적스러운 여행이라 더 마음에 들었어요. 그리고 둘이서 여행하는 마지막 도시라는 낯섦도 있었습니다. 이후부터는 친구 한 명이 더 합류할 계획이었거든요.



그런 생경함과 안정감이 함께했던 슬로베니아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인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의 배경이 되는 곳이라서 더 신비로웠던 것도 같아요. 책 속에 그런 말도 있더라구요. 슬로베니아에 사는 사람들 말고는 류블랴나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여러모로 비밀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이제 저와 제 친구는 류블랴나가 어딘지 확실히 알게 되겠죠. 오히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라서 더 애정이 생겼나 봐요. 일주일 내리 비가 왔는데도 괜찮았어요. 아주 잔잔한 시간이었는데도 어쩐지 가장 활기찬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무튼 이 휴식의 도움을 받은 것은 확실했습니다.


다음은 헝가리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