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베니아에서 평화로운 일주일을 보낸 후, 부다페스트로 넘어왔습니다. 야간버스를 타고 오면서, 부다페스트에는 한국인이 그렇게 많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한국인의 흔적이 별로 없었어서 꽤 기대하며 왔던 것 같아요. 그런 익숙함의 감각이 필요한 순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낯선 곳의 두려움이 아직은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이제는 알죠. 조금만 더 버티면 그 자그마한 두려움도 사라질 거라는 걸요.
새로 합류할 친구를 기다리며,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마셨던 스타벅스입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역시 좋은 거라는 걸 실감하면서요. 먹을 때마다 온갖 느슨함과 게으름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입니다. 특히 스타벅스는 원두가 다크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더구나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시간을 때워야 할 때는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친구를 기다리면서 28인치 캐리어 두 개와 백팩 두 개를 지고 다녔거든요.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쉬고 싶을 때마다 스타벅스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주는 권태감, 포용력, 당위성을 다들 감각하고 있지 않나요.
이곳은 가히 부다페스트 최고의 카페...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요. 앉아서 마실 공간도 없는데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제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몇몇 카페들이 있는데요. 슬로베니아의 모더나, 부다페스트의 비알유, 프라하의 리퍼블리카입니다. 생각해 보니 카페는 확실히 동유럽이 더 좋았네요. 서유럽에는 없을 소소한 감성들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 비알유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곳은 사실 디자인 샵이거든요. 가방을 파는 곳인데, 사장님이 커피도 그냥 팔아버려요.
총 두 번을 방문했는데요. 첫 번째는 분위기와 맛과 공간이 모두 좋아서, 좋다고 생각만 하다가 나와버렸어요. 그래서 마음을 굳게 먹고 두 번째는 사장님께 말을 걸었습니다. 공간이 너무 좋다고, 대충 이 카페의 시작을 물었던 것 같아요. 이 아름다운 콜라보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요. 그는 이곳이 가족 기업이라고 말했습니다. 디자인은 자기가 하는 게 아니고, 자기는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인데 커피를 좋아할 뿐이라고요.
그때부터 어설픈 저의 허술한 인터뷰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자주 뒤바뀌는 스몰토크였지만요. 저 역시 아마추어이지만 글을 쓴다고,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처음 소개해봤어요. 그리고 정식 에디터인 당신이 부럽다고요. 무엇보다 커피를 팔면서 글을 쓴다는 사실이 부럽다고요. 드림잡을 가진 그는 글로벌 매거진에 속한 에디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도 글을 한번 보내보라고 메일 주소를 적어주기 시작했어요. 이런 기회가 또 있나 싶어서 매거진 사이트에 들어가 봤는데, 유럽 문학에 대한 내용이더라고요. 영어로 에세이를 써본 적도 없는데, 문학에 대한 글은 절대 못 쓸 것 같아서 감격스러운 마음만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또 언젠가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요.
그냥 마음이 글을 향해 있으니 길이 이렇게 열리기도 하는 거구나, 그걸 깨달아서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기회란 건 언제 어디서 나를 향해 올지 모르는 거라고 느꼈어요. 어느 방향에서 오든 제대로 붙잡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다고요. 공식적으로 글 쓰는 인간이 되기 위해 마음을 항상 열어두고 기민하게 반응할 거라고요. 어쩌면 저는 그냥 무자비한 생각을 글로 풀어내기로 선택한 사람일 뿐이겠죠.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늘 궁금한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카페에서, 이 사장님과 대화하고 난 후에 저는 벙쪄있었습니다. 그간 여행의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하나님이 제게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네가 원하면 언제든 기회는 오게 되어있다고 사인을 보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그저 제가 지독한 운명론자인 걸지도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일정을 수행해 봅니다. 이건 사실 체코에 가면 많이 보게 될 굴뚝빵인데 부다페스트에도 있더라구요. 글쎄, 하는 마음으로 사 먹었던 것 같아요. 재즈 클럽에서 나와서 홀린 듯 먹었습니다. 그곳에서 좋은 에너지를 되게 많이 썼거든요. 노래로도 사람을 황홀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부다페스트 재즈 클럽’, 그리고 그 앞에 있는 굴뚝빵 노점상. 완벽하게 유럽스러운 코스였던 것 같아요.
부다페스트는 또 온천이 유명하죠. 세체니 온천을 다녀온 후에 노곤한 마음으로 커피를 찾아다녔어요. 꽤 비싼 마끼아또였는데 완벽한 아트를 선물 받아서 되게 좋았어요. 그런데 맛과는 별개로 이 커피를 마시면서 되게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 피곤하기도 했고, 조금 혼자이고 싶기도 했고, 남자친구랑 통화할 시간이 되어서 신경이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거든요. 혼자 카페 구석에 앉아있는데 노래는 너무 크고, 사람들 소리도 너무 시끄러워서 조금 홀짝이다가 바로 나갔던 것 같아요. 그냥 길에 앉아서 전화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았어요.
가끔 정신이 여러 곳에 흩어져있을 때가 있어요. 그걸 부여잡는 게 중요한데, 보통 카페에서 그게 잘 되는 편이거든요.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하는 것, 그런데 이 날은 카페에서 그게 잘 되지 않아서 좀 슬펐어요. 돈은 돈대로 쓰고 도망쳐 나온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가끔은 실패하는 날도 있어야 더 좋은 날도 생기는 거겠죠.
곧 부다페스트에서 비엔나로 넘어가게 됩니다. 한 도시에서 일주일 남짓을 보냈는데, 어떤 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또 어떤 날은 모자라다고 느끼곤 했어요. 부다페스트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한번 살아볼 만한 도시라고도 생각했고요.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그 미래는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비엔나로 가는 날은 아침 일찍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했습니다. 아침 8시 정도에 기차를 타야 했거든요. 그래서 아침으로 먹을 피자도 하나 샀는데요, 알고 보니 기차 시간이 한참 남았더라고요.
그래서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 들렀습니다. 역시 캐리어를 들고 들어갈 만한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요. 이제 보니 부다페스트의 시작과 끝이 모두 스타벅스였네요. 그만큼 도시적인 곳이라는 거죠. 무엇이든 어디든 많았거든요. 그래서 좋았습니다. 찾지 않아도 찾아지는 곳들이 좋더라고요. 아침 카페는 더 좋고요. 스타벅스에 오픈런을 해서 한 명은 자고, 한 명은 보고, 한 명은 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각자에게 필요한 것에 충실했던 시간이었어요. 그런 시간이 여행에서는 가장 소중한 것 같아요. 같이 있어도 혼자여서 좋은 날, 혼자여도 같이 있는 것처럼 충만한 날. 두 쪽 모두 여행에 꼭 필요하겠죠.
다음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