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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Apr 16. 2024

굽힐 수 없는 것

교회 내 청년 찬양팀을 하다 보면 어른들과 부딪힐 일이 생긴다. 매주 사용하는 연습 시간과 장소를 양보해야 하거나, 다른 부서는 다 아는 찬양제 참가 소식을 가장 늦게 전해 듣는다. 그럴 때면 그냥 네… 하고 고개를 숙인다. 다른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좋은 게 좋은 것일까? 팀원들의 존재와 어른들의 통보 앞에서 자꾸 갈길을 잃는다. 팀장으로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지, 청년으로서 잠자코 순종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은 나를 팀장의 자리에 앉힌 존재를 원망한다. 결국 하나님을 탓하고 만다.


요즘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며 지낸다. 믿는 자로서 행위가 꼭 필요한지, 믿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냐고 누군가 물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글모임을 하면서 답을 얻었다. 어떤 움직임도 없이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게 진짜 사랑이냐는 동료의 글 덕분이다.


형식은 본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 며칠 전 오빠와 차에서 나눈 대화를 요약하면 그렇다. 사역을 많이 하거나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짜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마음과 시간과 돈을 드릴 수밖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뭐든 주고 싶은 마음은 변치 않으니까.


그러니 우리를 감싸는 최소한의 형식과 행위가 필요하다. 믿는다고 하면서 누군가는 술에 잔뜩 취하고, 타인을 마음껏 미워하고 욕한다. 그가 진짜 하나님을 믿고 싶다면 행위를 먼저 가져갈 수 있다. 예배에 똑바로 참여하고, 감사로 불평을 대신하며 옆사람을 따라 기도하다보면 최소한 전보다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물론 그 안에서 끊임없는 검증과 통찰이 필요하다. 소중한 주말 대낮에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이유, 나와 남을 사랑해야 할 정당성, 나의 약함을 고백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행위는 겉치레로 남고 만다. 관성으로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가 의심된다면 언젠가 형식은 그의 손발을 묶는 밧줄이 된다.


<부활>이라는 영화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이런 거 다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다. 행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목매는 부와 명예도 진리 앞에서 쓰레기에 불과하다. 바울도 그렇게 고백했다.


[빌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가 절대 굽힐 수 없는 것은 시간도 권리도 돈도 아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예수로만 살고자 애쓰고 있는지다. 예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길 만큼 강렬한 사랑이 있는가. 그것 외에는 무엇을 굽히더라도 결코 우리를 망가뜨릴 수 없다.


[예수가 보이네, 어노인팅]

오늘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하네

내 모습 속에 예수님의 흔적이

보이기를 원하네


예수가 보이네 우리 삶 속에서

예수가 보이네 우리 모습 속에

예수로만 살려 몸부림치며

세상과 싸워 나가는

우리 모습 속에 예수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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