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다니엘기도회 1일차 이정규 목사님 말씀
[고전4:3-4]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오늘도 계속 살아가야 할 이유가 내게 있는가. 폭풍 같은 시간을 통과한 후 남은 흔적들. 그제야 바깥으로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린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살아가야만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의 정체성은 어디서 오는가.
과거에는 정체성이라는 게 ‘의무’로부터 왔다고 한다. 내가 출판사에서 일하면 나는 ‘출판인’이고 병원에서 일하면 ‘의사’라는 것. 소속된 집단에서 벗어난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결국 나는 나를 의미 있게 하는 바깥 세계,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현대는 자아를 ‘욕망’으로 인식한다. 크고 작은 꿈들이 나를 만든다. ‘글 쓰는 사람’ 혹은 ‘행복하고 싶은 사람’ 정도가 되겠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 자유라고 해도 계속 원하다 보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끝없는 갈구는 오히려 땅을 척박하게 한다.
주변인이 뭐라고 하든 ‘나의 생각’이란 게 훨씬 중요했다. 말 그대로 주변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타인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허용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위해 나라는 이름으로 꼿꼿이 선다. 내 생각이 중요하다는 건 전적으로 나의 판단만 믿는다는 뜻이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영역에 서지만 내 선택이 언제나 온전하지는 않다.
고린도전서 4장 3절을 보면 바울은 남의 판단도 중요하지 않지만 자기 판단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4절엔 스스로 자책할 내용이 없으나 그로 말미암아 의로워질 수도 없다고 덧붙이면서. 우리의 심판은 순전히 주님의 몫이라고 선언한다.
타인에게 의존하면 교만해지거나 비굴해진다. 평가에 목마른 사람은 남의 말에 따라 감정이 널을 뛴다. 한편 스스로에게 눈을 돌리면 외로워진다. 내 안에 갇혀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고약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지금의 내가 아닐까.
얼마 전에도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제는 남의 말을 지나치는 법을 조금 알게 됐다고. 진짜를 모르면서 마치 다 안다는 듯 구는 사람들이 오히려 손해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해, 사실 난 그렇지 않은데 그걸 모르는 건 네 손해지.’ 그래서 오해를 정정하지 않을 힘도 있다. 어디까지나 판단은 본인의 몫이고 책임도 본인의 것이니까. 나름 성숙한 앙큼함을 갖춘 게 뿌듯했는데…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나 역시 나를 판단하는 남들을 마음껏 재단했다. 그리고 내가 나를 판단하게 내버려두었다. 오히려 내 판단을 믿었고 충분히 그래도 된다고 부추겼다. 내 생각이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겠냐고 말하지만 금세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자주 외롭고 고립된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재단하고 저지르고 오만하고 무지한 나와 연합하신 분이 계신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와 완전히 연합하셨다. 남들보다 조금 잘났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는 나와 완전히 하나가 되길 원하셨다. 그 사랑의 폭을 가늠할 수 있을까.
믿음을 정체성으로 두고 살아가는 이들은 비난 받을 때도 오히려 감사한다. 마치 당장 다음주에 오스카 상을 받을 줄 알면서도 대중의 피드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배우처럼. 오히려 고마워진다. 겸손한 동시에 담대한 정체성이다.
“그분은 나와 연합하셨다.”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분께 너를 맡겨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최악의 명예 훼손을 당하시고 마치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 그냥 죗값을 치르신 게 아니라 심지어 그분의 명예를 우리에게 주셨다. 화목제. 그는 하나님과 우리를 잇는 통로가 되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할 수 있고 자유로워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정죄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