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하나를 더하면 우리 집이 된다. 엄마 없이 아빠, 남동생과 산다는 것. 다시 말해 유일하게 다른 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참 고된 일이다. 우리 집이 동성일체를 이뤘더라면 더 편안했을까? 물론 내 마음에는 더 나은 평화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집의 유일한 여자이기 때문에 밥을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어쩌면 아빠도 도마 앞에 섰을지 모른다. 못 미더운 두 아들내미보다 자신을 믿어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끝장나게 미더운 첫째 딸이 있었고… 엄마도 그걸 알았을 테다. 엄마가 죽자마자 열 살짜리 여자애가 무엇을 할지 그녀는 짐작했을 테고 멀리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엄마가 내게 물려주고 간 세상을.
내가 굳은 표정으로 부엌에 서있는 동안 내 등 뒤를 스쳐간 사람은 많았어도, 내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존재는 없었다. 기꺼이 내 줄텐데. 내가 알고 있는 미약한 지식과 칼질하는 법도 가르쳐주었을 텐데. 그럼 나도 누군가 차려주는 밥상을 기다리면서 웃어보았을 거다.
아무도 엄두를 못 내는 게 이상하리만치 답답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여성의 전유물이자 세계였던 부엌을 직접 침투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용기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든 흘러갔을 테니. 그러니 그 뽀송한 손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오는 쪽을 택했을 거다. 우리 아빠는 그랬다. 돈을 열심히 벌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불만 없는 온순한 딸로 살았다.
곧 경제적 자립을 할 텐데, 내가 돈을 벌면 누가 나 대신 요리해 주려나. 아빠가 돈을 안 벌고 내가 돈을 벌 때가 되면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식사를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가. hell no. 무엇보다 내가 자식을 낳으면 나와 자식과 아빠까지 챙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힌다. 그래도 이 걱정보다 배는 행복할 것이다. 나를 닮은 귀엽고 동글한 아기를 보게 될 날에는. 문득 아빠에겐 내가 보기만 해도 배부른 딸이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없이 아빠와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엄마만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영영 바랄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결혼과 임신, 그 후의 삶 같은 것들. 어제는 유튜브에서 입덧으로 고생하던 여자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는 걸 보면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이걸 글로 쓰다가 더 크게 울었다. 40분 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았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영상 속에서 그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뭐라도 먹으니까 내가 무슨 맛있는 음식을 해줄까 그 생각뿐이라고. 분명 내게도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그게 엄마는 아니겠지. 그러니까 미리 울어두는 거다.
가끔은 엄마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빠에게 물었던 엄마로는 한계가 있어서. 아빠가 말해주는 엄마는 그와 한 번도 싸우지 않은 아내였다. 책을 좋아하고 딸과 아들을 사랑하며 주기적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일기를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흔적도 없다. 내가 그걸 봤어야 하는데. 엄마는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고, 혼자 방에서 싸이월드를 하거나 일기를 쓸 때면 사랑하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래놓고 내가 인터넷 속 캐릭터에게 편지를 쓸 때 동생을 첩자로 보내 무슨 말을 썼는지 알아내기도 했지만.
다시 엄마가 아빠와 싸우지 않았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나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커플이 되고 사랑하고 부부가 되어 살아가기까지 단 한 차례의 싸움도 없을 수가 있나. 내가 기억하기로는 딱 한번, 어떠한 이유로 화가 난 엄마가 나와 동생만 데리고 외출을 시도하던 것이다. 그마저도 내가 아빠를 버릴 수 없다는 눈물겨운 다짐으로 아빠에게 돌아갔지만.
아마 그날도 아빠는 엄마가 준비한 아침밥을 두고 시리얼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러한 일들이 모여 엄마는 이골이 났을 것이다. 아빠를 영영 떠나버리는 건 아니었을 테지만 나는 그날 엄마의 독기를 봤고 쫄았다. 그래서 버려지는 쪽을 택했다. 엄마 방 화장대에서 울고 있는 나를 두고 아빠는 거실에서 스포츠를 보았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싸움이다. 싸움이라고 해야 할지 일방적인 경고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을 싸움으로 친다면 한 번도 화를 내본 적이 없다는 거다. 둘 다 진짜 지겹다. 내가 아빠에게 밥 하기 힘들다고 말하려고 수년을 준비한 게 우연이 아니었음을. 유전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확신하건대 싸움 없는 결혼 생활이 건강하지는 아니었을 거다. 엄마도 아빠도 참고 있었을 테고, 둘 다 용기가 없었을 테다. 그런 엄마의 자리를 내가 물려받았으니 아빠와 내가 복잡한 감정선을 겪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거야말로 소리 없는 전쟁이 아닌가.
아빠는 있고 엄마는 없지만, 엄마와 아빠를 믹스 매치한 딸과 아들은 있다. 그러니 우리는 좀 다른 삶을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족을 이끌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분명히 있었고, 나와 동생에게도 마찬가지다.
전통으로 어떻게든 이어온 나의 자리를 대신할 누군가가 없을까. 다른 여자 말고 우리 집의 두 남자 중에서. 그래야 나도 이 집에서 좀 살아볼 만하지 않나… 우리 집에 관해선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이게 판타지 대신 리얼 버라이어티 쇼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