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어릴 적 별명은 새침데기였다고 한다. 5남매 중 막내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별명이지만, 내게 엄마는 그보다 훨씬 깊고 신비로운 존재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일종의 치유다. 엄마를 잃은 지 14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 독립을 앞둔 과도기에 서있고, 동생은 군대에 가있으며, 아빠는 나와의 적당한 거리를 인정한 듯하다. 그러니 나도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아직도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곱씹어보려 한다.
아마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면 내 기억과 아빠의 기억, 할머니, 친구들의 것까지를 몽땅 긁어모아야 할 것이다. 나의 단편적인 기억 속 엄마는 말 그대로 문학소녀였다. 수많은 책을 읽고, 귀여운 글들을 썼다. 싸이월드를 좋아했고, <빨강머리 앤> 전집을 결혼기념일 선물로 받았다. 그 책은 나의 첫 애착 도서가 되기도 한다.
여름방학이면 내게 미숫가루 한 잔을 타주면서 엄마는 식탁에, 나는 소파에 앉아 각자의 책을 보곤 했다. 창문을 열어 두면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와서 하나도 덥지 않았다. 나를 임신했을 때 출산일기도 열심히 썼던 것 같다. 언젠가 한 번 봤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은 아마 태워졌을 거다. 엄마의 글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자음은 무지하게 크고 모음은 기가 막히게 작았던 그 언발란스한 글씨체를 생각해 보면, 보통의 인물은 아니었을 거란 짐작만 해본다.
그리고 지금의 나와 비슷하게, 탄탄한 허벅지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그가 청바지를 입은 사진을 보면 내 다리를 보는 것 같다. 흰 티를 입는 걸 좋아한 거 같은데, 그건 내가 물려받은 취향이기도 하다. 흰 티에 청바지는 그 때나 지금이나 무적의 조합이니까. 또 엄마는 뽀뽀 인간이었다. 셋째 이모도 그런 걸 보니 아마 핏줄의 힘인 것 같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내게는 뽀뽀의 핏줄이 흐른다. 실제로 우리 집은 출근/등교 때마다 일렬로 서서 뽀뽀하는 귀여운 관습이 있었다. 지금은 남자친구 말고는 아무랑도 못하겠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뽀뽀 애호가다. 아마도 내가 만든 가족이 생기면 같은 전통을 가져올 것 같다.
또 나는 친구 없이 못 사는 사람인데, 엄마도 하루에 한 번은 돌돌 말린 유선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엄마는 친밀한 사람들과 나누는 말을 사랑했다. 나도 엄마 친구들을 몇몇 만난 적은 있었지만 그들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친구였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건 그들 중 한 명이 엄마의 병상을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는 거다. 나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지만 그때는 엄마의 친구라는 존재가 낯설었고, 침대를 그렇게 흔들면 안 된다는 생각만 들었다. 엄마에게 친구는 딸, 아들, 남편, 엄마, 언니와 오빠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무언가였을 테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친구의 가족까지 우르르 모여 놀러 다녔으니 말이다. 누군가의 가족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게 가족이 아닐까 싶다.
엄마는 연약한 마음을 지녔지만 그래도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늘 웃고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나나 엄마나 웃는 상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존재 앞에서 맥없이 풀어졌다. 한 번은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으니 빨리 와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빠도 없이 우리 셋만 있을 때였다. 하필 그때가 저녁시간이라 엄만 우리에게 떡볶이를 해줬었고, 울기 직전인 엄마를 두고 나와 동생은 떡볶이를 먹었다. 눈물이 고인 엄마가 나를 보다가 픽 웃고는 맛있냐고 물었다. 나는 웃지도 못하고 맛있다고 했는데, 아마 이 기억이 선명한 이유는 그날이 내게도 꽤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일 거다.
떡볶이를 먹자마자 할머니를 찾으러 응급실에 가서는, 흰 천에 싸여 나가는 여러 몸들을 보고 겁이 났다. 다행히 엄마의 엄마는 곳곳에 큰 흉터를 남겼지만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리고 반쯤은 나의 엄마가 되어주고 있다. 가끔씩 스스로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귀여운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했는데’ 하는 식의 말들. 딸의 딸이지만 그런 것쯤은 건너뛰고 그냥 딸로 생각해 준다는 뜻일까. 이유가 어쨌든 그 말이 따뜻해서 내버려 둔다.
또 엄마는 정말이지 잘 삐치는 사람이었다. 삐친다는 건 그만큼 예민하고 또 소심하다는 거다. 그러나 동시에 세심하고, 기대를 잘하며, 쉽게 사랑하기도 한다. 한 번은 엄마가 자기 아들한테 크게 삐친 적이 있는데, 아들이 엄마에게 못할 말을 했기 때문이다. 함께 밥을 먹다가 엄마의 잇몸이 멸치에 찔린 거다. 아무래도 엄마의 엄살 같지만 본인은 나름 진심을 담아 ‘아파 죽을 것 같아’라고 말했는데, 아들이 거기서 ‘그럼 죽어’라는 식의 말을 한 거다. 다섯 살 무렵의 아들이 뱉은 말이었지만 엄마는 너무 큰 상처를 받았고, 모든 것에 무지한 아들이지만 삐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얜 진짜 싸가지가 없다. 나는 아마 평생 저런 말은 못 할 거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 울고 있는 엄마를 보고 당황한 건 나였다. 나는 같이 밥을 먹은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엄마의 동태를 살폈다. 엄마가 왜 우는지, 누구에게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편지를 썼다. 미안하다고. 저 때는 내 잘못을 인정하는 식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은 웬만하면 내 잘못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사과하지 않으려 한다. 사과를 남발하는 건 듣는 사람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그냥 엄마가 방에서 나오기를 바랐고, 동생을 때리고 싶었을 뿐이다. 결국 동생은 못 때렸지만 엄마는 방에서 나왔고, 나는 행복해졌다. 그리고 엄마의 닭볶음탕이라면 밥을 두 그릇씩 비우는 튼튼한 딸이 되었다. 엄마의 닭볶음탕은 하나도 안 매웠고 기름지지도 않았으며 으깨 먹을 감자도 많았다. 그건 그때의 내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이었다. 엄마만이 내 입맛을 정확하게 알고, 말하지 않아도 그런 음식을 해주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식성을 알고 그에 맞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건 명백한 사랑이니까. 나는 엄마에게 그런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 아직도 살아남았다. 엄마가 10년 동안 꾹꾹 눌러 담아준 그것을, 남은 70년간 야금야금 쪼개 먹을 계획을 세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