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라면 여주는 친구들과 옹기종기 떡볶이 앞에 있어야 했다. 과외 시간이 바뀌어서, 엄마한테 전화 와서. 각각의 이유로 친구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일 보자는 인사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까짓 저녁 한 끼 굶으면 어떻게 되나 싶다가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복감에 기분까지 울적해졌다.
그런 날이 있다. 매일 똑같이 반복하는 습관 같은 날들이 ‘오늘만은’ 싫은 날. 여주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울적해진 기분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데 저만치 주강이 보였다.
아는 척을 할까, 말까.
천천히 걸으며 쓱 녀석 옆에서 걸음을 멈췄다. 벽에 기대있던 주강의 어깨가 흔들린 거 같았는데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고 있다.
“너, 떡볶이 좋아해?”
어차피 먹을 떡볶이였다. 머리핀에 관해 물어볼 겸 배도 채울 겸 주강이 앉아있는 것뿐이었다. 떡볶이는 왜 이리 늦게 나오는지. 어색해서 물을 들이켜고 수저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떡볶이와 라면 한 그릇이 나오자 여주는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막상 음식이 나왔지만 여주는 망설였다. 떡볶이를 앞에 두고 머뭇거리다니. 여주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선뜻 빨간 떡볶이를 한입에 넣고 우걱거려도 괜찮을지 고민이 되었다. 주강은 라면이 불기 원하는 건지, 아니면 불어나는 라면을 관찰할 셈인지 젓가락조차 들지 않았다.
“먹어.”
신호탄처럼 여주의 한마디에 주강이 젓가락을 들었다. 터진 입술로 뜨거운 면발을 후루룩 흡입했다. 여주도 떡볶이 하나를 콕 찍었다. 입은 떡볶이를 먹으면서 눈은 흘끔흘끔 주강을 향했다. 언제나 친구들과 정신없이 떠들며 먹었는데 단둘이 앉아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와 일대일로 앉아 밥을 먹은 지가 언젠지 떠오르지 않았다. 특정한 한 명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는 건, 친구들의 무리 속에서 먹는 것과는 달리 불편하고 낯설었다.
왜 녀석은 날 따라왔을까. 정말 머리핀을 준 게 맞나. 여주는 그토록 좋아하는 떡볶이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덩치에 맞지 않게 조심스레 자신을 따라오는 걸음, 획 돌아봤을 때 움찔하던 몸짓, 그런데도 여주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눈빛까지. 주강의 의아한 모습을 연속으로 발견했다.
결국 떡볶이를 남겼다. 여주는 라면 그릇이 깨끗이 빈 것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여주가 돈을 내자 주강이 주섬주섬 돈을 꺼내 내밀었다. 분식집을 나와 둘은 걸었다. 정작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언제까지 녀석은 쫓아올 건지 말없이 걷기만 했다. 어느새 그녀의 아파트 단지까지 다다랐다.
“그만 가.”
“응.”
가란다고 간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 돌아서자 여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핀, 너 맞지?”
그의 뒤통수에 대고 여주가 소리쳤다. 휘적거리며 걸어가던 주강이 우뚝 멈춰 섰다.
“네가 만든 거야?”
왜 준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입에선 다른 말이 나왔다. 녀석이 뒤를 돌아봤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인데 여주의 눈엔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마워.”
여주가 활짝 웃었다. 봄바람처럼 설레는 웃음에 주강의 뺨이 붉어졌다.
하루 종일 교실이 떠들썩했다. 아침부터 여주를 찾아온 옆 반 반장 때문이었다.
“부럽다, 고백 편지라니.”
하경과 혜인, 보라는 여주보다 더 들뜬 상태로 흥분했다.
“우리 여주한테 남자 친구가 생기다니! 그래도 우리랑 놀아줘야 해?”
하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여주가 쑥스러워하며 편지를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처음 받는 고백에 얼떨떨했다.
“거절할 거야. 이상해.”
여주의 뚱한 대답에 혜인이 등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잘생겼지, 공부 잘하지, 인기 많지. 뭘 고민해?”
“그런가?”
기분이 이상했다. 남자 친구가 생긴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뒷자리를 쳐다봤다. 주강이 엎드린 채 자고 있었다.
하교 후, 친구들과 헤어지는 지점을 지나면 언젠가부터 주강과 나란히 걷곤 했다. 주강의 집이 어디인지, 가는 방향이 맞는지 모르지만 그는 말없이 여주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주강과 함께 걸으면 이상하게도 익숙한 길이 낯선 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이 다시 익숙해질 때쯤 여주는 물었다.
“나 왜 데려다주는 거야?”
“어, 그러니까…….”
주강에게 한 번에 대답을 기대하는 건 어려웠다. 머뭇거리고, 입이 달싹달싹 움직이다가 힘들게 겨우 대답하곤 했다.
“공부 잘하는 사람 좋아해?”
“응?”
뜬금없는 질문에 여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사람 좋아하잖아.”
“아마도 그렇겠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거리는 그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턴가 이 녀석은 험악한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짓만 골라 한다.
“갑자기 공부는 왜?”
여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주강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빤히 내려다보는 눈빛에 여주의 뺨이 붉어졌다.
“나 공부 가르쳐줘.”
“그래서 데려다준 거야?”
주강이 쑥스러운 눈빛을 띤 채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왜 하필 여주일까. 한 반에 서른 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는데. 여주는 괜히 딴청을 부리다 피식 웃는다.
“좋아.”
매일 이른 아침, 교실에 들어서면 주강은 항상 먼저 와 여주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해도 별거 없었다. 노트 필기를 빌려주고 선생님들이 강조했던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주강이 필기를 베끼는 동안 그녀는 창가에 기댄 채 책을 읽는 척하며 주강을 몰래 훔쳐봤다.
요즘은 싸움을 안 하는지 얼굴에 멍도 사라져갔다. 멍이 사라지자 그의 생김새가 눈에 하나씩 들어왔다. 길게 위로 살짝 뻗은 눈썹, 쌍꺼풀이 없는 눈, 쭉 뻗은 콧대, 무언가 집중할 때면 살짝 깨무는 입술까지. 싸움만 안 하면 여자애들에게도 꽤 인기 있을법한 얼굴이었다.
둘만의 비밀수업은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끝이 났다. 주강은 고마움의 표시인지 매일 여주 책상에 우유를 놓고 갔다. 여주는 마시지도 못하는 우유를 집에 가져가 쌓아두고 가끔 냉장고를 열어 쌓아둔 우유를 보곤 했다. 냉장고가 우유로 가득 차면 어쩌지 하는 생각보다 우유가 더 이상 쌓이지 않는 순간이 올까 봐 걱정됐다.
아침의 시작을 주강과 함께해서일까. 집으로 돌아와도 그의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잠을 자려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일어나 책도 보고, TV도 보며 생각이란 것을 멈추려 했다. 당연히 불가능한 시도였다.
그래, 생각을 어떻게 멈출 수 있겠는가. 문제는 생각 끝에 비집고 들어오는 주강 때문인걸. 가슴이 벌렁거리고 싱숭생숭해지고, 들뜨기를 반복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나 왜 이러지?’
방의 온도와는 상관없이 여주는 뺨이 붉어지고 뒤척이는 횟수가 늘어났다.
‘다 차주강 때문이야.’
옆 반 반장의 고백을 거절한 건 주강 때문이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반장이 싫은 건 아니었다. 친구들 말처럼 남자 친구를 한 번 사귀어 보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언제나 생각의 끝에는 차주강이 틈을 벌리고 비집고 들어왔다.
‘키는 멀대같이 큰 게. 그래도 뭐, 말은 잘 들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거울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빗을 집어 든다. 쓱쓱. 가르마를 바꿔보고 끈을 꺼내 묶고 풀고를 반복한다. 이마를 훤히 드러내고 끈이 짱짱해지도록 묶었던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끈을 던져버리고 머리카락을 빗겨 내린다.
“뭐 하니?”
엄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여주가 기겁하며 손에 쥐고 있던 빗을 냅다 던졌다.
“환영식치곤 과하네, 우리 딸.”
“엄마!”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여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밥은 먹었니?”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늦은 밤 들어온 엄마는 시간 감각이 무딘 건지, 오랜만에 들어온 민망함 때문인지 첫인사는 언제나 ‘밥 먹었니’였다. 엄마로서 당연한 질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앞뒤 상관없이 묻는 식사 안부는 ‘안녕’보다 못한 인사였다.
안방으로 들어간 엄마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고쳤다.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집이 아닌, 잠시 들른 집이었다. 언제부터 엄마에게 집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이 되었을까. 아빠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된 이후였나. 시계는 11시를 지나서 자정을 향했다.
“반찬 사다 냉장고에 넣었으니까 챙겨 먹어. 양념불고기 사 왔으니까 데워먹기만 해.”
“엄마, 또 나가?”
“아직 일이 안 끝나서, 엄마 다녀올게.”
일이 얼마나 바쁘면 집에서 잘 시간도 없을까. 여주는 엄마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지내는지 궁금했다. 반찬은 언제나 남아서 버리기 일쑤인데 같이 먹을 순 없을까 묻고 싶었다. 아빠랑은 싸웠는지, 별거 중인지, 두 사람은 헤어지는지 묻고 싶었다. 바쁘게 집을 나서는 엄마가 밉고, 원망스럽고, 슬펐다.
급히 냉장고에서 우유 하나를 꺼내 엄마를 따라나섰다. 그 흔한 ‘다녀오세요’도 언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대충 카디건을 걸친 뒤 서둘렀지만 엄마는 엘리베이터를 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망설이다 엄마의 동선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여주는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며 엄마의 모습을 찾았다. 깜깜했지만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차가 들어오며 라이트 불이 밝혀지자, 어둠 속에 가려진 엄마의 모습이 드러났다.
“엄마! 엄…….”
여주의 말이 뚝 끊기며 내디딘 걸음도 멈췄다. 환히 불을 밝히며 들어오는 차는 엄마의 손짓에 멈춰 서고, 차가 멈추자 엄마가 몸을 실었다. 차는 엔진소리를 내뿜으며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더니 그대로 빠져나갔다. 여주는 멍하니 차가 사라진 곳만 바라봤다. 자꾸 나쁜 생각이 들려 했다.
“구여주?”
뒤에선 들린 목소리에 여주는 움찔하며 몸을 돌렸다.
“커피쌤?”
“너도 그렇게 부르네. 내 별명이구나.”
혹시나 엄마를 봤을까 싶어 여주는 괜히 뒤를 흘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사세요?”
“친구네 놀러 왔다가 집에 가는 길이야. 넌 여기 사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선생님과의 만남이라니. 학교에선 상상도 못 한 모습이기에 여주는 의아함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냈다.
“선생님한테선 커피향만 나는 줄 알았어요.”
“오랜만에 친구랑 술 마셨거든.”
팔을 들어 킁킁거리는 선생님의 모습에 괜스레 웃음이 났다. 언제나 단정하고 반듯한 수학 선생님이자 커피를 좋아하는 상담실 선생님. 고민이 있든 없든 여학생들은 틈날 때마다 다양한 핑계로 상담실을 찾았고 점심시간에는 카페가 될 정도였다.
점심시간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는 여학생들은 선택받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엄청난 사랑을 받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이 한밤중에 술 냄새를 풍기며 뻘쭘해하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다.
“선생님은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 능력이 있는 거 같아요.”
“응?”
“우울할 뻔했는데 선생님 만나니까 기분이 좋아졌어요.”
여주의 밝은 미소에 유성은 머쓱하게 웃었다.
“난 창피한걸.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줘서.”
“비밀로 해드릴게요.”
“하하, 고맙다.”
나쁜 생각은 저 멀리 밀어버렸다.
“우울해서 산책 나온 거니?”
“비슷해요.”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들어가 보는 게 좋겠다. 아침에 빨리 나오려면 얼른 자야지.”
뭔가를 알고 하는 말 같아 여주가 뜨끔해 했다.
“주강이랑 친해 보이든 걸.”
“걔가 공부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공부?”
다음 날 아침, 유난히 주강의 입이 삐죽 나왔다면 기분 탓이었을까. 어김없이 시작한 둘만의 공부는 유성의 등장으로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여주는 선생님이 주는 커피를 반갑게 받았지만 주강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없던 말수는 더욱 줄어들었다. 이상하게도 여주가 미안해지는 상황이었다.
유성은 커피뿐만이 아니라 주강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나 이해되지 않는 공식을 쉽게 풀이해 줬다. 수학은 그녀도 어려운 부분이라 주강을 가르치기가 쉽지 않은 과목이었기에 내심 선생님의 도움에 감동을 받았다.
정작 당사자인 주강의 마음은 알 수 없었지만.
여주는 살금살금 걷다가 멈추고 뛰다가 멈추고를 반복했다. 길거리를 지나는 몇몇 사람들이 흘끔 쳐다봤지만 개의치 않고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다.
과거에서 하는 두 번째 미행이었다. 조마조마하고 금방이라도 들킬 것만 같아 심장이 콩닥거렸다. 선글라스나 스카프가 있었다면 얼굴 자체를 가렸을지도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어설픈 미행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미행할 생각은 아니었다. 옥상 사고를 막기 위해 과거로 왔지만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옥상 사고 당사자인 하경과 주강을 주목할 수밖에.
자신을 적대하는 하경에겐 가까이 갈 수 없으니 여주는 주강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그를 몰래 쫓았다. 집이 어딘지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 해줄 녀석도 아니지만 가끔씩 유성에게 신세를 지는 걸 보면 사정이 있는 듯싶었다.
전에는 그 녀석의 사정 따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에 관해 뭐라도 알고 싶었다. 자신이 떠난 후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더는 어른이 된 그에게 물을 수 없으니까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주강은 한 번에 쭉 가는 법이 없었다. 학교를 벗어나 텅 빈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네에 털썩 앉아 긴 다리를 이용해 앞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길 잃은 어린 꼬마처럼, 돌아갈 집을 잃은 사람처럼, 주인 없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이어서 그는 몇 분을 걸어가다 버스정류장에서 멈췄다. 여주는 주강이 버스를 타면 어쩌나, 택시를 탈까, 그를 놓치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나 녀석은 다시 걸었다. 공터 벤치에 앉기도 했고 여주와 함께 갔던 분식점 주변을 맴돌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길에서 보내다 그는 결심한 듯 집으로 향했다. 그는 빼곡히 들어선 주택들 사이로 유난히 멋스럽게 생긴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하얀 울타리와 정원이 있는 집. 주강은 잠시 멈춰 서 있다가 그 집으로 들어갔다.
여주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집을 살폈다. 정원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시든 화분과 멋대로 자란 풀들이 무성했다.
‘여기가 주강이네 집이구나.’
여주는 그가 어디에 사는지 몰랐다. 아빠가 일한 회사의 사장이 주강의 아버지란 걸 알기 전까지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 집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몰랐다. 둘 사이엔 생략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은 돌아가야 하나.”
주강의 집이 어디인지 확인했으니 아쉽지만 집으로 돌아가 유성을 만나 그에 관해 묻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여주가 이층집을 올려다본 후 돌아서는데 뒤에서 부서지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비명이 귀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여자의 비명이었다. 분명 주강의 집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맥박이 빠르게 뛰고 사고가 정치한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대문을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불안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녀가 열리지 않는 문을 치다가 담을 뛰어넘으려 다리를 올린 순간 동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또 시작이네, 시작이야.”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요즘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요.”
“에휴, 쯧쯧쯧!”
집에서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들 한다. 그러나 말만 거들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주는 참지 못하고 얼굴만 내민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아줌마! 저 집 아세요?”
“어휴, 말도 마요. 저 집 여자가 단단히 미쳤거든. 쯧쯧, 젊은 나이에.”
“미쳤다니, 대체 무슨…”
“아가씨 여기산지 얼마 안 됐나 봐? 저 집 여자가 한 번씩 집안을 온통 뒤집어놓거든. 멀쩡한 남편 바람 핀다고 난리를 쳐. 의부증이 심하다고 하더라고. 에구, 남편만 불쌍하지.”
“경찰이라도 불러야죠!”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거 아니야. 아가씨도 일만 더 커지게 하지 말고, 아가씨! 지금 뭐 하는 거야!”
아주머니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여주는 울타리 한쪽에 세워진 쓰레기 더미를 밟으며 주강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경찰이나 불러주세요!”
어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 뒤에 선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그녀는 정원을 가로질러 잠겨있지 않은 현관문을 열었다.
“주강아! 차주강!”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어둠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적막함에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정적이 감도는 공간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커튼에 가려진 커다란 유리창이었다. 저 커튼을 걷으면 빛이 잔뜩 들어올 텐데. 한기까지 느껴지는 집안의 공기에 그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일 층을 다 둘러보았지만 주강도, 그의 엄마도 보이지 않았다.
터억! 데구르르르.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동그랗고 작은 화장품이 2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녀는 가까이 가 화장품을 확인했다. 내용물이 쏟아진 화장품에선 얼마 남지 않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올라갈수록 진한 향이 풍겼다. 향이 진해질수록 불안함이 커져 심장이 요동쳤다. 길지 않은 계단을 다 오르자 진한 향이 무겁게 2층을 덮어 눌렀다. 그 사이로 희미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주강아!”
열린 문 사이로 주저앉은 채 벽에 기대어 고개 숙인 주강이 보였다.
“주, 주강아…….”
코를 찌르는 강렬한 냄새. 벽에 부딪힌 듯 부서진 유리조각과 파편들. 화장품이며, 옷이며 바닥에 널브러진 잡동사니. 고개 숙인 주강. 그리고 침대에서 흐느껴 우는 여인.
“여긴 어떻게…”
주강이 손이 피범벅이 된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붉은 피에 놀란 여주의 손이 떨렸다. 주강은 피 묻은 손을 뒤로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