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가 주강을 처음 본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였다. 뒷자리에 떡하니 자리 잡은 녀석의 얼굴에는 항상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거나 입술이 터져 있었다.
반 아이들은 몰래 수군거리며 다가가지 않았다. 주강도 딱히 어울리는 친구들이 없었다. 그저 뒷자리에서 잠을 자거나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 위협적이던 첫인상과 달리 교실에서 말썽을 부린 적도 없었다. 곧 교실에서 그는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여주가 그 녀석을 제대로 마주한 건 청소 당번이라 방과 후 학교에 남은 날이었다. 쓰레기통을 비우기 위해 학교 뒤편으로 가자 익숙한 얼굴이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야, 정말 이것밖에 없어?”
“너 뒤져서 나오면 100원에 한 대다?”
키 큰 남자애들은 유난히 체구가 작은 남학생을 둘러싸며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
‘쟤는 경훈이잖아.’
둥글둥글한 안경을 쓴 경훈은 1학년 때 여주와 같은 반이었다. 또래 남자애들보다 체구가 작아 반 애들이 짓궂은 장난을 걸기도 했다. 오늘은 그보다 더 심한 상황이었다. 경훈은 잔뜩 겁먹은 얼굴을 했다.
“야, 붙잡아.”
덩치가 경훈의 두 배만 한 애가 경훈을 붙들자 다른 한 명이 바지 주머니를 뒤졌고 정작 시킨 한 명은 지켜보기만 했다.
“어쭈, 4천 원? 그럼 몇 대냐?”
“너 더 있지? 교실에 있어?”
“그, 그게 다야. 정말이야!”
“너 저번에도 돈 없다고 하면서 문제집 떡하니 산 거 내가 봤거든?”
4천 원을 주머니에 넣고도 무리는 경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하, 정말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었거든.”
“다음에 더 가져올게. 그러니까……, 아악!”
남자애들이 발로 경훈의 다리를 걷어찼다. 경훈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자 무리는 더 신나게 발로 차댔다.
“너희들 그만 못해!”
부웅, 쓰레기통이 무리를 향해 날아가 계속 명령조인 녀석의 뒤통수에 정확히 명중했다.
“악! 누구야?”
가득 찬 쓰레기통에서 떨어진 쓰레기를 그대로 맞은 녀석이 꽥 소리를 질렀다.
“아씨, 놀래라!”
“너 뭐야?
“경훈아, 가자.”
여주가 무리 사이로 걸어가 경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 지금 무시하냐?”
“너, 3반 한성태지? 선생님께 말씀드릴 거야.”
당찬 여주의 태도에 잠깐 당황한 한성태가 어깨를 붙들었다.
“우리 경훈이랑 친구야.”
“친구가 돈을 뺏어?”
“너, 얘 깔이냐?”
여주가 눈을 흘기자 남자애들이 키득거렸다.
“너 예쁘다.”
“얘, 2반 부반장이잖아. 구여주.”
“너 우리랑 놀래?”
“이거 놔!”
성태가 여주의 팔을 붙잡았다. 실실 쪼개며 팔을 흔들자 이번에는 여주가 발로 걷어찼다.
“이 계집애가 진짜!”
두 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치를 봤고 성태가 정강이를 문지르며 눈을 치떴다.
“빨리 가자!”
그 틈을 타 여주가 성태의 등을 밀었다.
“가긴 어딜 가!”
“꺄악!”
여주의 하나로 묶은 머리가 성태의 손에 잡혔다. 잔뜩 약이 오른 성태가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아악, 너 이거 안 놔!”
“그러니까 진작에 까불지 말았어야지. 야, 쟤 붙잡아.”
성태의 명령에 두 명이 경훈이를 붙잡으려고 했다. 여주는 머리가 당기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성태만 약이 오른 게 아니었다. 여주는 지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에잇!”
“으악!”
여주가 머리가 잡힌 채 성태에게 달려들었다. 쿵, 그녀의 머리가 성태의 가슴으로 돌진했다. 성태가 뒤로 벌러덩 넘어가고 여주도 같이 엎어졌다. 툭, 머리에서 머리핀이 떨어졌다.
“내 머리핀!”
머리카락이 뽑힌 아픔도, 바닥에 넘어진 고통도 아닌, 망가진 머리핀에 여주가 울상을 지었다. 아빠가 생일 때 선물해 준 머리핀. 여주가 씩씩거리자 성태는 되레 화를 냈다.
“이게 정말, 여자라고 봐주니까!”
화가 난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여주가 지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그 눈빛에 순간 성태가 움찔했지만 지지 않고 손을 휘두르려 했다.
- 퍼억!
“악! 또 뭐야?”
또다시 성태의 뒤통수로 가방이 날아들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여주도 놀라서 토끼 눈을 하고 뒤를 돌아봤다.
“차, 차주강이다.”
두 남자애가 주강을 보더니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야, 차주강이잖아! 옆 학교 애들이랑 싸워서 죽사발 만들어놨다는 그 차주강!”
주강의 소문 중 하나였다. 다른 학교 무리와 싸워 혼자 이겼다는 풍문은 남학생들 사이에서 꽤 뜨거운 소문이었다. 남자애들이 가방을 집어 들고 도망가자 성태가 억울한 눈으로 두 사람을 째려보곤 친구들을 따라 도망쳤다.
갑자기 종료된 상황에 여주만 얼이 빠졌다.
“참! 경훈아, 괜찮, 경훈아?”
경훈이 보이지 않았다. 주강과 여주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갔어.”
주강의 느릿한 대답에 여주가 푹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머리핀만 부서졌네.”
폭풍처럼 휘몰아친 순간을 진정하느라 여주는 쭈그린 채 한참을 있었다. 주강은 말없이 여주가 기운을 차리고 그곳을 벗어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작은 소란이라고 여겼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다시 평온한 하루가 이어지는 듯했다.
“날씨 좋다, 놀러 가고 싶어.”
창밖을 보며 하경이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햇살이 반짝거려 어제의 일은 마치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저 여주도 봄기운에 마음이 살랑거리기만 했다.
“참, 너 들었어? 차주강 사고 쳤대.”
“사고?”
주강을 따르는 소문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기에 여주는 무심하게 흘려들었다.
“3반 한성태 알지? 일진처럼 몰려다니는 애들. 차주강이 걔한테 돈 뜯었대. 돈 없다고 하니까 엄청나게 때렸다던데? 성태네 부모님 오고 난리 났어.”
“뭐라고?”
흘려들은 이야기는 너무 익숙한 이야기지만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여주는 몇 번이나 하경에게 되물었다.
“이번엔 퇴학당할지도 몰라.”
여주는 벌떡 일어서 주강의 뒷자리를 쳐다봤다. 오늘 선생님이 그를 따로 불렀던 게 떠올랐다. 어제 일 때문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야, 어디가? 곧 수업 시작이야.”
곧장 교무실로 달려가 담임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상담실에 갔다고 옆자리 선생님이 말했다. 여주는 상담실로 가기 전 경훈을 찾았다.
경훈이 쭈뼛거리며 교실에서 나왔다. 여주는 하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두 전했다.
“나랑 같이 가서 말하자. 주강이가 성태를 때린 게 아니잖아.”
“나, 난 몰라.”
누가 들을까 경훈이 주변을 살폈다.
“차주강이 우리 도와줬잖아.”
동그란 안경 속 눈동자가 여주를 외면했다.
“난 모르는 일이야. 어차피 다 나쁜 놈들인데 누가 퇴학당하든 뭔 상관이야!”
“차주강 아니었으면 더 큰일났을지도 몰라.”
“그 자식도 똑같은 놈이야. 걔네 아니었으면 차주강한테 돈 뜯겼을걸?”
경훈에겐 그저 성태도 주강도 같은 가해자였다. 주강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성태는 꿈쩍하지 않았다.
“너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성태한테 거슬리면 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경훈이는 혹시라도 모를 후환에 겁을 냈다. 경훈이 교실로 들어가고 여주는 바로 교무실로 가지 못했다.
주강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내 고민하던 그녀는 수업이 끝나고 혼자 담임을 찾아갔다.
“선생님, 드릴 말씀 있어요.”
여주는 차분하게 어제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경훈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만 빼고. 당사자가 숨기는 것을 여주 마음대로 떠들 수 없었다.
“주강이가 성태를 때린 게 아니에요. 주강이는 절 도와줬어요.”
“그럼, 성태가 널 때리려고 했니?”
여주가 머뭇거리자 담임이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경훈의 얘기를 빼니 말이 매듭 지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강이만 피해를 보게 둘 순 없었다.
“저랑 성태랑 싸웠어요. 성태 때문에 제 머리핀이 망가졌거든요.”
거짓말보다는 각색에 가까웠다. 어쨌든 성태와 여주의 싸움을 주강이 막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차주강이 소문이 나쁘단 건 알아요. 하지만 한 번도 싸우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제가 본 건 저를 도와준 차주강이에요. 제 말을 못 믿으시겠으면 성태 불러주세요. 저랑 주강이, 성태까지 삼자대면하게 해주세요.”
여주도 말하면서 깨달았다. 아이들이 무서워 슬슬 피하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다. 다른 애들에게 시비를 건 적도 없다. 걱정으로 떨렸던 마음은 진정되고 여주는 또박또박 말했다.
“머리핀 때문에 화가 나서 쓰레기통으로 뒤통수를 때렸어요. 성태 정강이에 멍도 있을 거예요. 그것도 제가 차서 생긴 거예요. 벌을 받는다면 차주강이 아니라 제가 벌을 받아야 돼요. 화가 난 성태한테 맞을 뻔한 걸 주강인가 도와준 거니까요.”
처음으로 써보는 반성문이었다. 우등생까진 아니지만 나름 모범생인 여주는 반성문을 써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알면 기절할 거야.”
남학생을 때려서 반성문이라니. 구여주 인생에 다시 없을 순간이었다.
“일단 쓰자, 써. 써야 집에 가지.”
그나마 다행인 건 반성문에서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경훈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성태에게도 다행이었는지 여주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 되었다.
여주는 시험을 보는 것처럼 반성문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그때 상담실 문이 열리며 상담실 담당이자 수학 선생님인 서유성이 들어왔다. 여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팔로 슬쩍 반성문을 가렸다.
올해 첫 신규 교사로 온 유성은 회화고의 왕자님이었다. 단정하고 반듯한 외모에 다정다감한 목소리의 선생님은 개학날부터 온 학생들의 관심 대상이자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그가 담당한 상담실은 학생들로 붐볐다. 상담실에서 선택받은 자만이 선생님이 하사하신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유성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여주도 친구들을 이끌려 왔다가 북적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혀를 내두르곤 몰래 빠져나가곤 했다.
근데 반성문 때문에 오다니. 자기가 한 일에 후회는 없지만 아주 조금 창피했다.
그는 커피쌤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상담실에 들어오자마자 커피를 내렸다. 그윽한 향이 작은 상담실 안에 채워졌다.
“커피 좋아하니?”
그가 커피 한잔을 내밀었다. 여주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커피 싫어하니?”
“아니요.”
“마시면서 해.”
유성은 반성문을 쓰는 학생에게 너무 다정했다. 신기해서 올려다보다 두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가를 접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괜히 뺨이 달아올라서 샤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문득 여자애들이 왜 선생님을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았다. 여주에게 한마디씩 하며 나무랐던 선생님들과 달리 그는 말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여주는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아직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진하지 않고 연하게 입안에서 맴도는 맛이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마저 반성문을 쓰는데 톡톡 유성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음악 틀어도 될까?”
여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성은 볼륨을 낮춘 채 음악을 틀었다. 상담실에서 음악과 커피라니. 학교가 아닌 카페 같았다. 유성은 음악을 튼 채 책 한 권을 들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벚꽃이 만개한 풍경이 창으로 보이고 음악과 커피가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했다. 반성해야 할 공간에서 여주는 그만 감상에 빠져버렸다.
수업 종이 울리고 나서야 반성문을 마무리하고 일어섰다. 책을 보던 유성도 고개를 들었다. 여주가 꾸벅 인사하니 그도 눈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대로 나가려던 여주는 잠시 머뭇거렸다.
“선생님, 커피 맛있었어요.”
“다행이다.”
“사실 여태 교무실에서 선생님들한테 한마디씩 들었거든요. 선생님께도 들을 줄 알았는데 선물을 받은 거 같아요.”
“선물?”
여주의 말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반성문 쓰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유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자꾸 반성문 쓰러 오면 곤란해.”
“어쩔 수 없었어요.”
“후회하지 않는다는 거지?”
그가 여주의 마음을 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네가 손해볼 걸 알고도 솔직하게 말한 거 잘했어. 책임을 질 줄 아는 용기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어.”
그녀의 마음에 벅찬 감동이 올라왔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뜻을 유성이 알아줬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꾸벅 인사하고 상담실을 나왔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내 보이지 않던 주강은 하굣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여태 누구 때문에 이리 고생했는데. 여주는 괘씸해서 미간을 좁힌 채 주강의 뒤통수가 뚫어져라 노려봤다.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가방을 삐딱하게 멘 채 걷던 주강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여주는 깜짝 놀라서 무작정 걸었다. 최대한 무표정하게. 고맙다는 말을 하면 받아줄 마음 정도는 있다는 듯이.
“넌 입이 없니?”
녀석이 아무 말도 걸지 않아 참지 못하고 돌아선 여주가 주강 앞으로 걸어갔다.
“입에 지퍼라도 달렸어?”
따박따박 따지는 여주 앞에서 주강은 벙찐 얼굴을 했다.
“네가 언제 한성태 때렸어? 안 했으면 안 했다고 말해야지. 나랑 경훈이 도와줬다고 말했어야지!”
주강을 보자 참았던 화가 났다. 하마터면 퇴학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고맙다는 말도 못 했는데 여주는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가 오해받는 게 싫었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성태의 잘못을 뒤집어쓴 게 억울했다.
“무서웠을 거야.”
“뭐?”
“그 안경, 솔직하게 말하면 그놈한테 맞을지도 모르니까.”
안경은 경훈이었고 그놈은 성태였다. 경훈도 겁냈던 부분. 같은 이유로 경훈과 주강은 입을 다물었다.
“바보 같아.”
경훈이는 네 생각 한 적 없다고, 오히려 너도 나쁜 놈으로 본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자꾸 참기만 하려니 표정 관리가 안 되어 입술이 삐죽 나왔다.
차주강, 누가 널 무섭다고 했을까. 이렇게 미련 곰탱이 같은데.
여주는 몸을 돌려 걷다가 다시 주강에게 돌진하듯 다가갔다.
“너 학교에서 이미지 별로거든. 넌 요만큼 잘못해도 이만큼으로 불어버리니까 네 걱정부터 하란 말이야!”
정작 성태네 무리에게 덤빈 건 여주였지만 속상한 마음에 주강에게 소리쳤다. 솔직히 말하면 경훈이 피해를 볼지도 모르기에 주강이 입을 다물었단 사실은 미처 생각 못 한 부분이었다. 그의 깊은 마음에 여주는 더 속상했다. 그래서 주강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며칠 후, 텅 비어있어야 할 교실에 생각지 못한 인물이 먼저 와 여주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여기 내 자린데.”
여주의 새침한 목소리에 주강이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건 며칠 전에는 없던 멍과 상처였다.
왼쪽 눈가엔 푸르딩딩한 멍이 있었고 입술은 터져 있었으며 뺨에도 자잘한 긁힌 자국투성이였다. 여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
“어가 아니라 여기 내 자리라고.”
그의 입술이 말할 듯 움직이다 이내 다물어졌다. 뭔가를 망설이는 눈빛이 여주를 향하다 벌떡 일어섰다. 순간 놀란 여주가 몇 발짝 뒷걸음질 쳤다.
“비, 비켜줄래?”
언제나 교실 구석에서 잠만 자던 녀석. 결석을 밥 먹듯이 하고, 학교에 오는 날이면 엎드린 채 수업은 듣지도 않는 녀석. 그런 녀석이 이른 아침부터 교실에 나타났다. 그것도 남의 자리에서. 하굣길에서 본 후 처음이었다. 여주는 괜히 의자를 한번 쓸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온전히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아침의 짧은 시간이 녀석에게 방해받자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문제집을 가방에서 꺼내 풀어도 뒤에 있는 녀석이 내심 신경 쓰였다. 여주는 자꾸 뒤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더 꼿꼿이 하는 데 힘을 썼다.
오전 시간이 지나고 아침 기억도 잊어버릴 때쯤 교실은 점심시간이 되자 북적거렸다.
“여주야, 상담실 가자.”
“또?”
“커피 마시러!”
하경은 점심시간만 되면 무리를 이끌고 상담실로 가곤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여주를 재촉했고 다른 아이들도 발을 동동 굴렀다.
“빨리 안 가면 다른 애들한테 자리 뺏긴단 말이야.”
“너희 먼저 가.”
“베프! 요즘 배신의 연속이야!”
하경이 볼을 부풀리며 팔을 콕 찔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선생님의 커피가 맛있긴 하지만 점심시간을 북적거리며 보내긴 싫었다. 아이들이 상담실에서 정신없는 점심시간을 보내는 사이, 그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이 시간이 좋았다.
아이들 틈에 쓸려 종종걸음으로 상담실을 기웃거리는 것보다 창밖으로 나름의 사색을 즐기는 것이 더 좋았다. 하경은 그런 여주에게 “이 재미없는 것.”이라며 핀잔을 주곤 시원하게 등짝을 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문득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교실 창을 통해 보는 풍경은 특히 봄이 가장 아름다웠다. 풍성한 벚꽃이 바람에 살랑거리며 달콤한 꿀 향기가 나는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풍경이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 서 있었다.
‘어?’
원래 저렇게 눈에 잘 띄는 녀석이었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푸른 멍을 달고 있을 녀석. 차주강이 풍경 안에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어?’
눈이 마주친 것 같아 여주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멀어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경이 따라갈걸.’
자꾸만 자신의 시간을 방해하는 녀석이 얄미워졌다. 여주는 지금이라도 상담실에 가기 위해 꺼내둔 책을 책상 밑에 집어넣었다.
“뭐지?”
툭, 뭔가가 걸려 책이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넣어봤지만 뭔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책 대신 손을 안쪽으로 쭉 집어넣었다. 손에 뭔가가 잡혔다.
‘이게 뭐지?’
손을 빼내 손바닥을 활짝 폈다.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친구들이 넣어놨나 싶지만 모양이 투박한 것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머리핀?’
투박한 모양이지만 분명 나비 모양의 머리핀이었다. 여주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그새 녀석은 풍경 안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은파입니다.
<시간 카페 흐노니>는 주1회 수요일 연재로 변경되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신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