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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Nov 05. 2024

[소설] 16화 달라진 사람들(2)

아파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위를 올려다봤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집. 그 불빛만으로 엉망이었던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녀의 집은 언제부턴가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항상 불이 꺼져 있었다.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엄마 역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줄었다. 그때부터 여주는 비어있는 집에 혼자 들어갔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집이 일상이 되었다. 그런 집이 지금은 따스한 온기와 함께 밝은 빛이 베란다를 통해 뿜어져 나왔다.


선생님이 기다리는 집. 그 사실만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녀는 약봉지를 든 채 엘리베이터를 탔다.


‘약을 바를 걸 그랬나.’


일단 집으로 왔지만 내심 상처 난 얼굴이 신경 쓰였다. 약봉지를 쳐다보니 정작 상처 난 주강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생님?”


거실 불은 켜져 있지만 집안은 고요했다.


“어디 가셨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는 제 방으로 향했다. 약도 바르고 헝클어진 머리도 정리하며 선생님이 오기 전까진 쉬고 싶었다.


달칵, 문손잡이를 돌리는데 그녀의 방에도 불이 켜진 채였다.


“어?”


“오셨…”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여주는 소리를 질렀다. 그건 방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약봉지를 안겨주고 터덜터덜 걸어가던 녀석이 왜 자신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건지! 맨몸을 드러낸 채 바지 버클을 붙잡고 있던 주강이 허둥지둥 벗어둔 티셔츠를 찾았다.


‘흉터가 없어.’


당황했던 여주는 주강의 맨몸을 빤히 주시했다. 어디서 싸웠는지 멍 자국과 상처는 있지만 이든에게 있던 커다란 흉터는 없다. 그 흉터는 옥상 사고에서 생긴 걸까.


“뭐, 뭘 봐요!”


얼빠진 얼굴로 옷을 입은 주강이 부끄러워 소리 질렀다.


“미안. 근데 네가 여기 왜 있어?”


“제 방이에요.”


“여긴 내 방, 이 아니라 다른 사람 방이라고 들었는데.”


주강은 방은 둘러보다 여주를 올려다보더니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여전히 대답은 느린 게 주강다웠다.


“죄송해요. 아무도 없어서 들어왔어요.”


주강은 쭈뼛거리며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주강에게 도움을 받았을 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 자리에 여주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그가 이번에는 그녀를 도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경의 물음을 무시하는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네, 알아요. 선생님께 들었어요.”


“아…….”


“선생님 여자 친구가 여기서 지낼 거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조용히 방에 있으려고 했는데…”


“그래, 맞, 뭐?”


“여기 있으면 안 될까요? 조용히 없는 듯 있을게요.”


그녀는 입을 벙긋거렸다. 갑자기 선생님 여자 친구라니. 거기다 차주강도 여기서 지낸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약 발랐어요?”


“응? 아, 아니.”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는 그녀를 향해 주강이 소파를 가리켰다.


“너 선생님 학교 학생이지? 왜 여기 있어?”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한 번에 대답해 줄 리가 없지.’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주강은 조용히 약봉지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아얏.”


연고 뚜껑을 열던 여주가 아픈 손목에 인상을 찡그렸다. 주강이 그녀의 손에서 말없이 연고를 가져갔다. 주강은 연고 뚜껑을 열고 약을 손가락 위에 짜 여주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내, 내가 할게!”


여주는 얼떨결에 주강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주강이 움찔하며 여주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그녀는 민망해진 손을 내려놓았다. 주강은 여주의 얼굴과 손에 긁힌 상처들에 골고루 연고를 펴 발랐다. 머리채를 잡고 서로 흔드느라 몰랐는데 자잘하게 긁힌 손톱자국들이 꽤 있었다. 거기에 팔목은 세게 잡혀 불그스름한 손자국과 함께 시큰거렸다.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상처를 보니 속상했다. 과거로 와서 영 못 볼 꼴만 보는 건 아닌지. 혼자 낮게 중얼거린 여주의 눈빛은 씁쓸했다. 가장 친한 친구와는 머리채를 잡고 싸우고 그토록 미워하던 녀석은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와 손목 찜질을 해줬다.


“다정하다, 너.”


무심코 나온 말에 주강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올려다봤다.


“누구랑 닮았네.”


“누구요?”


다정했던 이든이 떠올랐다. 차주강인지 의심하며 그의 다정함에 의문을 품었던 시간이 후회되었다.


“있어. 다정한 사람.”


주강의 궁금한 눈길을 외면하곤 여주는 그에게서 수건을 뺏었다.


“그 아이도 그랬어요.”


“응?”


“유일하게 나를 다정하다고 해줬어요.”


그 아이. 그건 구여주 자신이었다.


그랬다. 만날 싸움만 하던 녀석을, 18살 그녀는 다정하다고 했다. 얼굴에는 멍을 달고서도 정작 위협적인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욕은커녕 말수도 적은 주강은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그녀의 속도에 맞춰 걷고, 언제나 그녀를 기다려주는 녀석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난 내내 널 미워했는데. 원망했는데. 처음 과거로 온 날, 널 만난 후 악몽이라며 끔찍했는데. 지금 앞에 녀석은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졌다.


“그 아이가 누군데?”


그녀가 없는 동안 이 녀석은 어떻게 지냈을까. 도착하자마자 맞고 있는 녀석을 본 게 떠올랐다.


“날 미워하는 사람이요.”


원망만 했지, 주강에 대해 생각한 적은 없었다.


“널 왜 미워해?”


그는 시선을 내린 채 대답이 없었다. 여주의 입에선 긴 숨이 흘러나왔다.


“내가 늙은 건가. 네가 어린 건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 뭐에요?”


털어놓은 한숨과 함께 여주가 주강의 머리를 손으로 흩트려 놓았다. 지금 드는 기분이 뭔지 모르겠지만 눈앞에 녀석이 한없이 어리기만 했다.


“고마워서.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주강의 얼굴이 빨개졌다. 덩치만 커다란 순한 강아지 같았다.


꼬르륵. 그의 배에서 난 소리에 일순간 두 사람의 행동이 멈췄다.


“너 진짜 굶고 다녀?”


당황한 주강의 얼굴은 빨개지다 못해 더 짙게 붉어졌다.


“아니에요!”


강하게 부정하며 주강이 고개를 흔들었다. 가정형편이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건 아니었다.


“밥을 안 먹으니까 그 덩치에 맞고 다니지.”


그녀의 핀잔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먹을 게 있으려나.”


여주가 냉장고 안을 살폈다. 주강이 주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이거 먹어도 돼요?”


주강이 카레 냄비를 가리켰다. 유성과 먹고 남은 카레였다.


“잠깐, 그거!”


냉장고에 안 넣어 상했을지도 모르는데 주강은 가스 불을 켜고 숟가락까지 챙겼다.


“맛 이상하면 바로 뱉어.”


가스레인지 앞에서 카레를 사수하는 그를 보며 여주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 맛을 보고 괜찮은 거 같아 밥솥에 남은 밥을 펐다. 정말 며칠 굶은 사람처럼 밥을 먹는 녀석을 보고 여주는 피식 웃었다.


“아까 그 애, 하경이 맞지? 하경이랑은 사이가 안 좋니?”


그는 밥을 먹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싸운 것처럼 보이던데.”


“싫어요.”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경이를 싫어하니?”


“박하경 때문에 그 애가 전학 갔어요.”


“그 애?”


“이 집, 저 방 주인이요.”


의외의 대답에 여주가 놀라 주강을 빤히 쳐다봤다.


주강이 설거지하는 동안 다시 질문을 던졌다. 왜 하경이 때문에 전학을 갔다는 거니? 그러나 묵묵부답. 오늘 할 말은 이미 다 했다는 듯 그의 일자로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다.     


유성이 돌아온 건 주강이 방에 들어가고 그녀가 혼자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선생님, 잠깐 저랑 얘기해요.”


두 사람은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방이자 지금은 유성의 방이었다.


“주강이한테 왜 거짓말하셨어요?”


“주강이를 아시는군요. 사고 때문에 안 게 아니죠?”


“그, 그럼요. 여주한테 들었는걸요.”


그의 말에 여주는 긴장하고 말았다.


“이든 씨한테 먼저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아시다시피 여주와 주강이 사이가 좀 그렇습니다. 이든 씨가 사촌 언니인 걸 알게 되면 주강이가 여기 오길 꺼릴 거 같아서요.”


“주강이가 왜 여기서 지내죠?”


“여기서 지낸다기보다는 가끔 자러 옵니다. 주강이 집에 문제가 좀 있어서요.”


유성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생님으로서 타인에게 학생의 개인적인 일을 말하는 걸 마음에 걸려 했다.


“저 선생님은…”


언제부터 주강이와 가까워진 거죠? 선생님은 주강이를 원망하지 않나요? 차주강 때문에 곤욕을 치렀는데 왜 감싸고 있는 거죠?


그것도 내가 살았던, 나의 공간에서.


그녀는 물을 수 없었다. 지금은 여주가 아니니까. 그녀가 묻는다 해도 그에게선 제대로 된 답변을 듣긴 어려울 것이다.


“집에 오다가 우연히 그 애를 만났어요. 선생님 집에 찾아왔던 학생이요.”


“하경이요?”


여주는 주강이 아닌 하경의 얘기를 꺼냈다.


“여주 친구 맞죠? 여주한테 들은 기억이 나요.”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저한테 적대적이었어요. 여주한테 들은 거랑 많이 달라서 좀 놀랐어요.”


“혹시 무슨 말을 했습니까?”


“네? 아, 아뇨. 그냥 저를 싫어하는 거 같아서요.”


유성의 과민한 반응에 그녀는 놀라서 대충 얼버무렸다.


“다 제 탓입니다.”


그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선생님…….”


이상했다. 주강과 유성의 관계도, 유성과 하경의 상태도. 유난히 하경의 얘기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유성의 태도도. 고작 전학 간 지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가 알던 사람들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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