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생의 얼굴을 확인한 여주의 눈이 커졌다. 단발머리의 교복을 입은 학생은 그녀의 단짝 친구이자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박하경이었다. 앳된 얼굴의 친구를 알아본 여주는 반가운 마음에 이름을 부를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시간이 많이 늦었다. 그만 돌아가.”
“나 배고프단 말이에요.”
하경의 목소리에 여주는 목을 길게 빼고 유성의 어깨너머를 흘끔거렸다. 하경이 유성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집까지 찾아와 조르다니. 하긴, 하경은 점심시간마다 상담실에 가자며 친구들을 끌고 가곤 했다.
“누구세요?”
무작정 집 안으로 들어오던 하경이 여주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누구예요? 선생님 여자 친구는 아니죠?”
밝았던 하경의 목소리가 단번에 매서워졌다.
“박하경, 어서 돌아가.”
“선생님!”
반가운 여주의 마음과 달리 하경은 그녀를 휙 째려보았다. 여주도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는 걸 감지했다.
“학생 좀 데려다주고 올게요.”
유성이 끌고 나가다시피 하경을 데리고 나갔다. 하경은 마지막까지 여주를 적대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째려봤다.
“하경이가 왜 저러지?”
언제나 밝고 싹싹했던 친구 하경. 처음 본 친구의 적대적인 모습에 여주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주는 연이어 다음날도 학교로 향했다. 오늘은 꼭 주강을 만나리라 다짐하며. 먼저 여주는 운동장부터 살폈다. 주강은 운동장 구석진 나무 그늘에 앉아있곤 했다.
‘그때 다친 학생을 보러 가도 될까요? 걱정돼서요.’
그때 다친 주강이 걱정된다며 만나보고 싶다는 말에 유성은 흔쾌히 학교로 오라는 말을 했다.
‘주강이한테 남으라고 할게요. 하교 시간에 맞춰서 오세요.’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선생님의 도움을 받다니. 감사한 마음에 여주는 지금 과거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급 수제 과자까지 사 왔다. 커피와 잘 어울리니 선생님에게 좋은 선물이 될 거라 확신했다. 어서 선생님께 과자를 드리고 주강도 보고 싶어 걸음을 빨리했다.
“아얏!”
부푼 마음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데 몸이 기우뚱 뒤로 휘청이며 머리칼이 쭈뼛 섰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간신히 균형을 잡았으나 무자비한 힘으로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고통이 얼얼하게 머리를 울렸다. 그녀는 과자 상자를 든 채 머리를 감쌌다. 갑자기 당한 봉변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머리채를 잡은 상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하, 하경아!”
씩씩거리며 여주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여고생은 그녀의 친구인 하경이었다. 아픈 머리를 문지르며 그녀가 놀라서 내뱉은 이름에 하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쓰며 팔짱을 꼈다. 아주 아니꼬운 눈으로 흘기면서.
“하경아?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 우리 쌤한테 들었겠네.”
하경의 적대적인 눈빛에 여주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녀는 여주의 기억 속 친구가 아니었다. 낯선 모습에 여주는 굳은 채 서 있었다.
“우리 선생님한테 꼬리 치지 말아요! 이건 경고예요.”
“하경아, 내가 꼬리를 치다니 무슨 말이야.”
어제 하경의 얼굴을 봤을 때 며칠 전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다. 12년이란 공백은 많은 것이 달라졌음을, 그녀가 기억하는 박하경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하경은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런데 왜 눈빛만은 낯선 걸까.
“남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이야!”
하경이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언제나 밝고 친구들 사이에선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하경이었다.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지만 선생님들도 하경을 예뻐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친구는 반짝거렸다.
“무슨 오해가 있나 봐. 난 그저…….”
“집까지 모자라서 학교까지 드나들고. 그게 꼬리 치는 거 아니면 뭔데요?”
가시 돋친 말에 여주는 입을 벙긋거렸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그녀지만 가장 친한 친구에게 꼬리나 치는 여우 취급을 당하다니. 유일하게 네 편이라며 그녀를 믿어줬던 친구 건만. ‘네 친구 여주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으며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선생님 꿈도 꾸지 말라고요! 워낙 선생님이 착해서 오냐오냐 받아주는 거니까 착각하지 말라고!”
엄청난 공격, 적대심, 독설. 모두 하경에게서 보지 못한 것들이다. 선생님과 집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골목에서 맞고 있는 주강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큰 혼란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오해야. 난!”
“이건 뭐야?”
하경은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다만 여주의 손에 들린 상자에 시선이 꽂혔다.
“선생님이 줬어요?”
하경이 거침없이 과자 상자를 낚아챘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가 하경의 손에서 우악스럽게 뜯겨 나갔다. 마치 자신의 마음이 뜯겨 나가는 거처럼 여주는 착잡했다.
내용물을 확인한 하경의 예쁜 얼굴이 일그러졌다. 과자 상자를 유성이 그녀에게 준 선물로 오해한 게 분명했다. 여주는 급히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 아니야! 그건 내가 선생님 드리려고!”
아뿔싸, 하경의 냉랭한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우르르륵, 툭둑. 툭.
하경은 그대로 상자를 뒤집어 과자를 길바닥에 쏟았다. 고급 수제 과자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부서졌다. 하경은 거기에 더해 발로 밟아 과자를 짓이겼다. 부서진 과자와 찢긴 상자는 처참했다.
“그만해! 어리다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과자가 부서지자 여주의 마음도 무참히 부서졌다. 울컥한 마음에 그녀는 하경의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제지했다.
“이거 놔!”
하경이 소리쳤지만 그녀는 팔을 놓지 않았다.
“아악!”
하경도 참지 않았다. 길게 내려온 여주의 머리칼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기며 악을 썼다.
“다시는 선생님 옆에서 집적거리지 않겠다고 말해!”
하경이 놓아주지 않자 여주도 손을 뻗어 단발머리를 움켜쥐었다. ‘아악’ 거리는 비명과 함께 친구와 머리채를 잡았다. 기가 막히면서도 본능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맞서 싸웠다. 그러나 힘에서 여주가 밀렸다. 손힘이 어찌나 좋은지 여주가 휘청거렸다. 반면 하경에게 머리채를 강제로 맡겨야 했다. 하경은 눈에 불을 켠 채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댔다.
“박하경!”
두 사람 사이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동시에 하경의 억센 손이 떨어져 나갔다. 여주는 머리를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차주강, 너!”
하경의 목소리에 움찔하며 여주가 고개를 들었다. 주강이 인상을 쓴 채 하경의 팔을 붙들었다.
“괜찮아요?”
차주강이었다. 그녀의 기억 속 상처투성이 차주강. 여전히 밴드를 붙이고 상처를 달고 사는 차주강이 눈앞에 있었다. 여주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 여자 알아?”
주강이 하경의 팔을 밀쳤다. 하경이 밀리듯 떨어지자 주강이 여주에게 다가가 부축하며 얼굴을 살폈다.
“알 거 없어.”
주강이 손을 잡고 이끌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딜 가!”
“비켜.”
하경이 앞을 막아서자 주강이 인상을 썼다.
“너 아는구나. 이 여자가 누군지.”
“신경 꺼.”
여주를 바라보며 안쓰러웠던 주강의 표정이 하경을 향하자 싸늘하게 변했다. 쳐졌던 눈꼬리가 잔뜩 가늘어지며 매섭게 하경을 노려봤다. 하경도 날이 선 눈으로 두 사람을 쏘아봤다. 주강은 부축하듯이 여주를 기대게 한 다음 어깨를 감싸안았다. 하경이 보든 말든 그는 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대로 그녀를 지나쳤다.
“약 사 올게요.”
하경이 안 보일 때까지 걷던 주강은 약국이 보이자 걸음을 멈췄다.
“자, 잠깐만.”
여주가 잡기도 전에 그는 재빨리 약국으로 들어갔다.
“내가 도움을 받아버렸네.”
그녀의 입에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과거로 와서 기껏 한 일이 옛 친구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거라니. 더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더니 매번 상상을 초월한 일이 일어났다.
“여기요.”
그리고 이번에는 이 녀석에게 도움을 받아버렸다.
“고, 고마워.”
그녀가 어색한 인사를 하자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잠깐만!”
약만 주고 돌아서는 주강을 급히 잡았다.
“다리는 괜찮아?”
여주는 저도 모르게 주강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가 당황한 듯 괜찮다며 손을 뺐다.
“아, 미안.”
어린 주강에게는 그저 낯선 여자일 뿐일 텐데. 여주는 자꾸만 일렁이는 감정을 추스르며 그의 다리를 쳐다봤다. 곧게 선 두 다리는 그의 말대로 괜찮아 보였다. 걷는 데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 알았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더 헝클어뜨렸다.
막상 주강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그토록 원망하고 미워하던 녀석이 저 녀석이 맞을까. 험악했던 인상이 유난히 앳된 얼굴이라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선생님한테는 뭐라고 하지.’
계획도, 약속도 엉망이 되었고 꼴도 말이 아니었다.
‘아니야. 가야 돼. 하경이에 대해서도 물어봐야겠어.’
과거에 온 시간을 허투루 쓸 순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그가 있을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