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가 여기 있었는데, 이상하다.”
현관 앞 낡은 신발장 깊숙이에 손을 넣은 채 여주는 더듬거렸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최대한 팔을 뻗어 더듬거려도 손에 열쇠가 잡히지 않았다.
진이 빠진 그녀는 한참을 문 앞에 주저앉았다. 과거로 오자마자 주강을 찾았다. 학교에 몰래 들어가 교실로 찾아갔지만 주강은 없었다. 같은 반 학생에게 물어봤지만 잘 모른다는 듯 고개만 흔들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주강을 발견했던 골목길도 샅샅이 둘러봤지만 그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차주강을 확인하고 싶었다. 제 눈앞에 있는 차주강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무심하게도 나타나 주지 않았다. 종일 주강을 찾다가 온 곳은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오래된 아파트였다.
회화를 떠난 후에도 집은 한동안 비어있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이 장만한 집. 작고 오래된 아파트지만 엄마, 아빠는 진짜 우리집이라며 행복한 얼굴로 웃으며, 청소를 하고, 또 하며 집을 가꿨다.
그만큼 애정이 깃든 집이라 엄마는 회화를 떠나면서도 팔지 못했다. 여주가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 엄마가 아파트를 팔았다는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
아직 집을 판 시기가 아닌데, 열쇠도 가져간 걸까. 쭈그린 채 앉아 신발장을 바라보던 여주는 옆에 있던 작은 화분을 들었다.
“열쇠다!”
작은 화분 받침 안에 열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친 얼굴에 반가움이 깃든 여주는 열쇠를 집어 벌떡 일어났다.
‘다시 집에 오다니.’
여주는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처럼 집안을 둘러봤다. 도망치듯 떠났기에 가구가 그대로 있었다. 세 사람이 항상 함께했던 거실엔 TV와 소파가 단출하게 남아 있었고 작은 냉장고와 세탁기도 그대로였다.
“사람이 살아?”
가구는 그대로였지만 텅 비어있어야 할 집에 사람의 흔적이 보였다.
“분명 빈 집이어야 하는데…”
아파트가 처분되기까지 이 집은 분명 빈집이었다. 그런데, 베란다에 걸려있는 빨래가, 현관문에 둔 신발이, 주방에 있는 그릇이 사람의 흔적을 나타냈다.
- 철컥
마침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해!’
그녀는 달려가 문고리부터 잡았다. 열리던 문이 닫히자 밖에서 다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고장났나?”
밖에서 나는 남자 목소리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밖에서는 더 세게 문고리를 돌리며 잡아당기고 여주도 안간힘을 쓰며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거기 누가 있습니까?”
밖에서 수상함을 감지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야!”
“저, 저기, 잠깐만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남자가 이상해 여주도 입을 다물었다. 그때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수상한 사람이.”
통화 소리에 놀란 그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저 여기 살던 사람…!”
과거에 오자마자 정체를 들킨다면 그것보다 더한 낭패가 어디 있을까. 그녀는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 몇 가지 대책을 세웠다. 그녀가 쓸 이름, 그녀의 정체 등. 하지만 과거로 온 순간부터 그녀의 계획은 예측처럼 맞지 않았다.
“서, 선생님?”
“누구시죠?”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신고하려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서유성, 그녀가 구한, 28살의 선생님이었다.
“저를 아세요?”
유성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되물었다.
“어, 어떻게 선생님이…”
“누구, 아! 그때 그분이군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의문을 내뱉었다.
“여긴 우리 집, 아니 우리 이모 집이에요. 이모.”
세원 둔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켜 그녀의 입에서도 두서없는 대답이 나왔다.
“이모요?”
유성이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여긴 제가 아는 분이 살던 곳인데 이모라면, 여주…”
“네, 맞아요! 구여주요!”
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그녀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모에요, 이모! 여주가 이모라는 게 아니라.”
“여주 어머님이 이모님 되시나요?”
허둥지둥 말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네! 맞아요! 그거예요, 그거!”
흥분한 여주의 강한 긍정에 그는 놀라면서도 의심의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전 분명 빈 집인 줄 알고 왔거든요. 열쇠도 그대로 있고요.”
“정말 여주 어머님 조카분이 맞으세요?”
“그럼요! 저 여주랑도 친해요. 서유성 선생님 맞으시죠? 여주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전학 간 후에도 편지 주고받는다고요.”
여주는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 냈다. 여기서 그가 신고한다던가 엄마에게 연락하면 낭패였다.
“아……”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선생님…….’
잠깐의 침묵을 기다리며 여주는 선생님을 바라봤다. 그는 그대로였다. 단정한 머리도, 그와 잘 어울리는 하늘색 셔츠도, 다정한 눈매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사고에서 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놀란 마음도 점점 진정됐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계속 여기 서 있을 순 없으니.”
그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고 여주가 그 뒤를 따랐다. 그는 소파를 가리킨 후 주방으로 가 자연스레 커피를 준비했다.
‘선생님 커피라니.’
12년 만에 맛보는 선생님 커피에 왈칵 눈물이 나려 했다. 따뜻하고 향기롭던 선생님의 커피는 여주에게 위로였고 위안이었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여전히 선생님의 커피는 향기롭고 따뜻했다. 커피를 마시자 다시 용기가 샘솟은 여주는 먼저 놀란 유성의 마음을 헤아렸다.
“제가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여기서 좀 지내려고 했거든요. 이모 몰래 온 거라 선생님이 사시는지 몰랐어요.”
“그랬군요. 저 때문에 놀라셨겠네요.”
그는 찬찬히 여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주도 계획대로 자신이 생각해 낸 사정을 말했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그래도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혹여 정체를 들킬까,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때는 감사했어요. 절 구해주셨는데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했네요.”
여주의 신원을 확인한 유성은 안심하자마자 뒤늦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난 일이었다. 여주는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그 학생은 괜찮나요?”
“아, 주강이요?”
그의 머뭇거림에 불안으로 여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아요. 생각보다 경과가 좋아서 학교도 다니고 있어요.”
“정말요?”
거짓말일 리 없다고 믿으면서도 그의 머뭇거림이, 그의 미소가 이상하게 불안으로 다가왔다.
“여주는 잘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그 목소리에 여주는 제대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애틋한 눈빛이 그녀를 마주했다. 그는 12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당연하다. 여주에게는 1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그에게는 고작 몇 달이 흘렀을 뿐이니까.
“네, 잘 있어요. 선생님 덕분에요.”
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미소에 여주의 마음이 아렸다.
“아,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서유성입니다.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칩니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통성명했다.
“아, 저는 구여…”
하마터면 입에서 ‘구여주’라는 이름이 튀어나올 뻔했다. 여주는 심장이 철렁거려 마른침을 삼켰다.
“이든이에요.”
이든. 차주강이 12년 만에 구여주를 만난 이름.
‘주강아, 이름 잠깐만 빌릴게.’
그를 꼭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여주는 자신을 이든이라고 소개했다.
“선생님, 부탁이 있어요.”
“부탁이요?”
“초면에 무리인 거 알지만 저 여기서 머무르게 해주세요!”
여주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자신이 생각해도 미친 사람 같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여기서요?”
당황한 유성이 되물었다.
“당분간만요! 저 매일 있진 않을 거예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 갈게요. 제발 부탁드려요!”
“남자만 사는 집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선생님이잖아요! 당연히 괜찮죠.”
여주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18살로 돌아간 것처럼.
“당분간만이라면.”
유성은 애매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제 방, 아니 여주 방 쓸게요.”
혹여 그의 마음이 바뀔까 그녀는 후다닥 일어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하루가 길다.”
과거로 온 지 하루 만에 그녀는 기운이 빠진 채 문 앞에 주저앉았다.
‘내 방도 그대로네.’
침대와 책상, 옷장과 책장이 전부인 방이지만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마음이 놓였다. 거울을 보며 그녀는 자기 모습을 점검했다. 혹시나 정체를 들키진 않을까 화장도 머리도 다시 매만졌다.
“선생님 저녁 드셨어요?”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그녀는 방에서 나와 유성을 찾았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낼 순 없었다. 선생님과 몇 마디라도 더 나눠야 그와 친해질 테고, 그래야 도움을 청해 주강을 구할 테니까.
“먹을 만한 게 없는데. 잠시만요.”
유성이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여주도 그의 어깨 너머로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며 주방을 살폈다.
“어, 카레다! 선생님 카레 좋아하세요?”
“좋아해요.”
카레 가루를 발견한 여주가 반갑게 물었다. 유성이 대답하며 넣을 만한 채소를 찾았다. 긴장하고 놀랐던 아까와는 달리 여주는 신이 났다. 마치 18살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빠가 집을 나가고 이 집에서 제대로 된 밥을 몇 번이나 먹었을까. 밥을 한 적은 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게 낯설게 다가왔다.
“음, 좋은 냄새.”
카레의 진한 향이 온 집안에 풍겼다. 여주는 음식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세월이 지난다고, 아이가 어른이 된다고 못 하는 것이 저절로 잘하게 되진 않는다. 요리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재주도 없었다. 카레는 워낙 간단하니 한 번에 많은 양을 해놓고 며칠씩 먹곤 했다.
“맛있어요!”
맛을 본 여주가 유성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레와 밥을 듬뿍 담은 두 접시, 계란프라이 2개, 마트에서 사 온 김치. 상차림은 간소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차린 저녁이었다.
“입에 맞으세요?”
“정말 맛있어요, 이든 씨.”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이든이라고 불릴 때마다 주강의 죽음이 떠올라 목이 메였지만 유성이 볼까 얼른 물을 마셨다.
“초면에 여기 살게 해달라고 하고, 같이 밥 먹자 그러고. 저 충분히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제 말 들어주시고 같이 밥도 먹어주셔서 감사해요.”
“당황스럽긴 했는데 이든 씨 입장에서는 제가 불청객이잖아요. 원래라면 이 집도 비어있어야 하고요.”
“불청객이라뇨, 절대 아니에요. 여주 선생님이신걸요.”
그녀는 손을 급하게 휘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는 역시 다정하고 차분했다. 여주는 선생님의 그런 부분이 좋았다.
“카레 많던데 자주 드시나 봐요.”
여주가 찬장을 흘끔 보며 물었다.
“네. 해 먹기도 쉽고요. 너무 자주 먹으니까 친구들이 질리지도 않냐고 놀릴 정도예요.”
그가 또 한 숟가락을 푼 다음 김치를 올려 입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입을 움직이며 먹는 그의 모습에 여주의 입가에 스르륵 미소가 지어졌다.
“특히 채소와 사과 들어간 카레를 좋아해요.”
“저도요. 고기보다 채소 들어간 카레를 좋아해요.”
“식성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이거 반가운데요?”
공통의 관심사. 같은 취향. 맛있는 음식.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최상의 조건. 소박하지만 정성이 들어간 따뜻한 음식은 그녀에겐 긴장을 풀어주는 역할도 함께했다.
“선생님, 저건 커피 원두네요? 커피 좋아하세요?”
다 알고 있지만 일부러 그녀는 그의 흥미를 끌 만한 화제를 꺼냈다. 그는 이제 완전히 경계심이 사라진 듯했다. 여주는 거기에 힘입어 더 이야기를 끌어가려 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선생님!”
그가 문을 열자마자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있었구나. 다행이다. 또 밥 안 먹었죠? 내가 맛있는 거 사 왔어요.”
9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한 여주는 궁금증에 그의 어깨너머를 흘끔거렸다.
‘하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