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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25. 2024

[소설] 12화 너의 고백

가파른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 복잡한 골목길을 헤매어 찾았던 반지하.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도 낡은 반지하도 모두 사라졌다. 그 자리에 번듯하게 세워진 대형 카페.


저 안에 유성이 있겠지. 커피를 좋아하는 선생님이니 학교를 그만뒀어도 제법 잘 어울리는 현재였다. 만약 유성이 선생님이 아니라면 소소하게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직접 내린 커피를 팔진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현재의 그는 여주의 상상을 뛰어넘었지만.


고작 선생님을 붙든 거밖에 없는데. 대형 카페를 운영하는 선생님이라니. 자신이 바꾼 현재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여주는 카페에 들어가지 않고 발을 돌렸다. 현재에서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덜거덕거렸다.


차주강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


그가 수술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후유증이 생기지 않게 재활 운동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현재로 돌아왔다. 유성의 인생이 바뀐 만큼 그 사고가 차주강의 삶에도 영향을 끼쳤을까. 회사의 전화 한 통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를 그의 소식이지만 그 전화 한 통이 어려웠다.


그녀의 고심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회사가 먼저 그녀를 찾았다. 퇴사 처리를 위한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소식을 그녀에게 가져다줬다.


- 정규직 전환 못 들으셨어요?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그토록 바라던 정규직 전환이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기에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정규직 전환이 된 거죠?”


회사에 이미 살인자의 딸이라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을 텐데.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주인공이 구여주라는 걸 알 텐데. 이런 상황에서 정규직 전환이라는 건 말이 안 됐다.


- 해명 자료 충분히 검토했고요. 저희는 문제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최범석 과장의 악의적인 행동으로 구여주 씨가 피해자란 게 명확하고요.


“최범석 과장이요?”


여주의 책상에 난도질하고 익명게시판에 글을 쓴 게 최범석 과장의 짓이라고?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인사팀은 명확한 증거를 확인했으며 해고 처리가 될 거라 답변했다.


- 그동안 최범석 과장이 계약직이나 인턴들 디자인 도용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익명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도 여주의 자리를 난도질한 것도 모두 차주강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 반대로 차주강은 움직였다. 증거를 찾아내고, 소명자료를 준비한 것 모두 차주강이었다.


모두 퇴근한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입구에서 멀지 않은 그녀의 자리. 여주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빨간색 페인트로 살인자라고 난도질이 된 자리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흔적조차 없이 말끔한 자리 앞으로 걸어간 여주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의자 등받이를 붙잡았다.


“다신 안 오는 줄 알았어.”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몸을 돌린 순간, 눈앞에 마주한 사람은 그녀의 기억 속 차주강이었다. 혼란스러웠던 게 우스울 만큼 이든이라고 했던 남자는 차주강의 눈빛을 했고, 기억 속에 자리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도와줬어?”


“바로잡고 싶었어.”


여주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는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걸음도 이상하지 않았고 유성처럼 다리를 절지도 않았다. 안심이 되면서도 사고의 잔상이 떠올라 여주는 입술을 힘겹게 뗐다.


“왜? 어째서?”


현재가 어떻게 바뀌든, 주강이 다쳐도 여주가 구한 건 유성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현재의 자신을 구하려 한 걸까. 과거에도 현재에도 차주강은 늘 여주를 혼란스럽게 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어.”


항상 여유로우면서도 단호한 이든이 아닌 차주강의 목소리였다. 느릿하면서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 여주는 그 목소리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련하게 후회하는 건 지난 과거만으로 충분하니까.”


빤히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유달리 애달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죄가 될 수 있더라. 나의 방관으로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줬어.”


그건 고해성사였다. 흐트러짐 없던 단정한 얼굴에 슬픔의 빛이 드리웠다. 그 모습이 어느 날의 볼품없이 망가졌던 녀석을 떠오르게 했다.


“구여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흘러넘쳐 여주는 무작정 뛰었다. 그의 속죄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만약, 아주 만약 단 한 번이라도 마주친다면 힐난하고 원망하고 싶었다. 둘 사이엔 남은 건 그런 너절한 감정뿐이라고 여겼다.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그런 후회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만큼 아픈 눈을 보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그 눈빛에 가슴이 저미듯 아파질 줄 몰랐다. 어쩌면 그녀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정작 다른 말이었을지도.


이든이 그녀를 쫓아 옥상에 올라왔다. 어둑해진 하늘을 응시하던 그는 눈을 찌푸리며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등졌다. 그는 가만히 여주의 옆에 앉았다. 여주가 모든 눈물을 흘려보낼 때까지 말없이 곁을 지키다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렸다. 조심스러웠다. 잡지도 못한 채 가만히 온기를 전해주는 몸짓에 끝난 줄 알았던 눈물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넘쳐흘렀다.


“여긴 너무 높다. 너무 춥고.”


눈물이 잦아들 때쯤 그가 작게 말하며 손을 잡아 왔다. 작은 손을 감싸는 큰 손이 따뜻했다.


“우리 떡볶이 먹을래?”


여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다른 것도 좋고. 일단 내려가자.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심각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에 실소가 터졌다. 눈물이 마르니 웃음이 배어 나올 자리가 생겼나 보다.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지? 12년 전에 못 했던 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말고. 너한테 보여줄 게 있거든.”


그의 말에 떠오르는 물음은 뒤로 밀었다. 더는 그가 내민 손을 내치기 싫었다.


“흉터는 언제 생겼어?”


“어릴 때, 그러니까 네가 전학 간 후. 유리 조각에 긁혔는데 꽤 깊숙이 들어갔어.”


“또 싸웠어?”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아프셨어. 가끔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때 던진 병에 긁힌 거야.”


“양어머니?”


“친어머니. 돌아가셨어.”


12년의 공백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좋아한다고 해서 그를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주강은 말이 없는 만큼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것도 그가 후회하는 점일까.


“흉터 만져봐도 돼?”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주는 살며시 손가락 끝으로 흉터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에겐 보이지 않는 흉터가 더 많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여주의 손길이 느릿해지자 그가 손을 잡아 왔다. 짙게 남겨진 원망의 감정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옥상을 같이 내려온 후로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같이 저녁을 먹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움켜쥔 마음을 털어놓을 준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자칫하면 와르르 쏟아질 마음을 차분히 다독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사이 시간은 흘러 차츰 봄기운이 올라오고 앙상했던 가지엔 초록 잎이 움트기 시작했다.


“나랑 데이트해 줘.”


“데이트?”


“응. 나 너한테 고백할 거야. 고백할 게 아주 많거든.”


여주는 탁상달력에 그와 만나기로 한 날을 표시했다. 어서 그의 고백을 듣고 싶었다. 그녀가 모르는 게 무엇인지, 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는지. 12년 전 차주강이 하지 못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여유로운 주말. 머리가 맑았다. 빨리 그를 만나고 싶었다. 묘한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채 여주는 머리를 매만지고 몇 벌 없는 옷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옷을 골랐다. 몇 번이나 거울을 보고 잘 하지 않는 화장도 했다.


저녁의 봄바람은 서늘했지만 해가 길어져 밝았다.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으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큰길에 도착하자 깜박이는 신호등 건너 마중 나온 그가 보였다. 여주는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그때 그가 돌아보며 여주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구여주!”


그가 그녀를 불렀다. 긴장했던 마음이 어딘가 벅차올랐다. 그가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었다.


“기다려.”


그가 좌우를 살피더니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든이 아닌 차주강으로서 만나는 시간. 먼 거리도 아닌데 그 순간만큼은 멀게 느껴질 만큼 그가 다가오는 것이 기다려졌다.


주강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뛰어오는 순간 갑자기 큰 소리가 울리며 차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달려왔다.


찰나같이 짧은 시간이었다. 클랙슨 소리보다 빠른 차, 웃으며 뛰어오다 달려오는 차를 돌아본 그.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굳은 다리. 귀에 박히는 커다란 소음. 그리고 중력을 거스르듯 날아오르던 그의 몸.


눈을 깜박이는 사이, 그의 몸이 바닥으로 거세게 곤두박질쳤다. 봄기운이 완연하던 주말 저녁의 거리가 노을과 함께 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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