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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24. 2024

[소설] 11화 과거가 바뀌는 순간

어둑해진 밤길을 무작정 걸었다. 정체를 들킬까,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주강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밤이라 표정을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기요. 있잖아요.”


주강은 간혹 옆구리의 고통을 호소하며 비틀거리다가도 여주를 놓칠세라 금세 큰 보폭으로 그녈 따라잡았다.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다가 입을 다물기를 반복했다.


‘정신 차려! 지금은 도망갈 때가 아니야.’


여주는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유성을 찾지 못한다면 주강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미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쫓아 올 거니?”


몸을 획 돌리자 쫓아오던 주강이 멈칫하며 급히 섰다.


“골목길에서 그쪽이 나 도와줬어요?”


주강을 볼수록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언제나 한 번에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여전하구나. 일말의 동정심은 사라지고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 내가 도와준 거야. 낑낑거리며 널 병원에 데려다 놓았다고.”


주강이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보자니 기분이 점점 묘해지기 시작했다. 짜증은 나지만 훈계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여주를 어른으로 대하는 주강, 주강을 아이로 대하는 여주. 처음으로 과거로 온 사실이 뿌듯해지는 유치한 마음.


“도움을 받았으면 최소한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예의니까.”


이 녀석 얼굴이 이렇게 순했던가. 주강은 맨날 멍을 달고 다녀서 반 아이들 사이에서도 험악한 이미지였다. 키가 크고 언제나 맨 뒷자리에서 상처 난 얼굴로 잠만 잤다. 반 아이들은 당연하게 그를 피했다. 그런데 이리 얌전히 말을 듣는 녀석이라니. 여주는 의기양양해져 좀 더 큰 소리를 냈다.


“넌 계속 쫓아오면서 나한테 민폐만 끼치고 있어. 알아?”


주강이 머리를 긁적거리다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주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거슬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링거 바늘을 빼버린 손, 절뚝거리며 따라오는 걸음, 여주를 부르다가도 옆구리 통증으로 신음을 내뱉는 모습. 거기에 어울리지도 않는 영양실조까지.


그리고 다시 비틀. 하아, 그녀의 입에서 두 번째 한숨이 새어 나왔다.


며칠 전 그녀에게 모멸감을 준 그가 이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니, 지금의 주강은 12년 전 그녀의 기억 속과도 달랐다. 그때는 유난히 큰 녀석이 위험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너무 어렸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제 발 저린 도둑처럼 피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쫓아오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주는 거리를 두고 주강을 따라갔다. 그가 버스를 탔을 때는 급하게 택시를 잡았다. 시간은 점점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가까워졌다. 그때였다. 주강이 버스에서 급하게 뛰어내렸다. 여주도 헐레벌떡 계산하고 택시에서 내렸지만 주강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에 그를 놓치고 말았다.


여주는 몇 번이나 사건 장소를 돌았다. 차주강이 보이지 않았다. 골목이란 골목은 모두 살피고 무리 지은 학생들의 얼굴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어스름한 빛이 비쳤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까지 뛰었지만 유성도 주강도 찾지 못했다. 바보 같아서 울컥한 여주의 눈가가 붉어졌다. 쓸모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기적 같은 기회가 생겼는데 나약한 자신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선 아주 작은 것만 바뀌어도 과거가 휙휙 바뀌었다. 그래서 주강을 붙들고 있어도 유성에게 무슨 생길까 봐 붙잡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붙들어 둘걸. 한심했다. 이런 바보 같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릴 때는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아무 힘도 없는 열여덟이 싫었다. 어른만 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눈물이 나서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아 훌쩍거렸다.


바보 같은 자신한테 화가 나서. 선생님에게 아무 힘도 되지 못해서 눈물만 흘렀다. 한 번만 더 기적이 찾아오길 바란다면 이기적인 걸까. 단 한 번만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면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제발 선생님을 구할 힘을 달라며 눈물을 닦는 순간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어디 아프세요?”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바라고 바랐던 마음이, 간절의 크기가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눈앞에 있을 리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길에서 주저앉아 우는 사람을 못 지나치는 사람. 유성은 그런 사람이다. 도움을 필요한 사람을 못 지나치는 사람. 학생 한명 한명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선생님.


여주는 손등으로 눈물을 박박 닦고 힘겨운 첫 마디를 내뱉었다.


“알아요. 이상한 사람 아닌 거.”


유성이 나타난 것만으로 이미 기적은 일어났다. 마치 모든 불행을 잠재운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쫓아왔다고요?”


“무조건 뛰어서 도망쳤는데 무서워서 눈물이 났어요. 창피하네요.”


유성은 그녀의 거짓말을 순순히 믿었다.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네, 괜찮아요.”


이대로 시간을 끌어 유성과 주강이 만나지 못한다면 그가 다치는 일도, 학교를 관두는 일도 없겠지.


“저 좀 바래다주시면 안 될까요? 혼자 가긴 무서워서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유성을 만나 안심했지만 아직 사건을 해결한 게 아니기에 긴장이 여주를 짓눌렀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유성을 사건과 멀리 떨어뜨려야 했다. 이상한 사람이 쫓아와 무섭다면서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여자가 유성에게 수상하게 느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는 곤란한 듯 손목시계와 여주를 번갈아 봤다.


“급한 일 있으세요?”


“제가 사람을 찾는 중이라서요.”


아마 그가 찾는 사람은 차주강이겠지. 그 녀석 때문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고, 그저 주강을 찾는 게 그에게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사람들이 많은 곳까지 데려다드릴게요.”


주변을 살핀 유성은 결국 여주와 나란히 걸었다. 빈 건물과 공사 현장이 많은 동네는 어수선해서 여주의 거짓말에 신빙성을 더했다. 여주는 걸으면서 유성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기억 속의 선생님과 다시 만난 것도 신기했지만 항상 어른으로 보였던 그가 이제 제 또래의 남자라는 게 신기했다.


그때 유성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어떤 무리가 두 사람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주강이었다. 주강이 중년 남자의 앞을 무리에게서 막고 있었다.


여주는 기사에서 본 일진 무리라는 걸 바로 알아챘지만 이상했다. 기사대로라면 주강도 그 일진 무리 중 한 명일 텐데 지금은 중년 남자를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유성의 방향이 주강을 향하자 여주는 그의 옷자락 끝을 잡았다. 기사랑 실제가 다르든 같든 상관없었다. 유성만 지키면 되니까. 오직 여주에겐 그것뿐이었다.


“가지 마세요.”


유성의 의아한 시선이 여주를 향했다. 여주는 옷자락을 놓지 않은 채 그를 바라봤다.


“아는 사람을 본 거 같은데 잘 못 봤네요.”


유성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는 분명 차주강을 봤으나 모른척했다. 도움을 청하는 여자를 내버릴 수 없어서였을까. 


‘이유가 어떻든 잘됐어.’


무언가를 따질 여력이 없었다. 그저 이 장소에서, 차주강에게서 떨어뜨리는 게 먼저였다.


“서유성 선생!”


유성을 불러세운 건 차주강이 아닌 중년 남자였다. 온 세상이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하게 불러세우는 목소리는 탁하고 마치 쇠를 가는 소리처럼 꺼칠했다.


“자네 학생 데려가야지! 당신 선생이잖아!”


선생이라는 말에 무리가 움찔하며 주춤거렸다.

 

그때 한 남학생이 남자의 손에 든 것을 갈취했다. 남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학생을 잡기 위해 뛰었다. 남자가 남학생을 넘어뜨리자 들고 가던 봉투가 공중으로 던져지더니 돈다발이 우수수 떨어져 흩어졌다.


바닥으로 여기저기 흩어지는 돈을 향해 남자와 무리가 뛰어다녔다. 그때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신 건. 돈을 줍는 남자를 향해 차가 클랙슨을 울리며 달려왔다. 유성의 몸이 남자를 향해 뛰려 했다. 여주는 본능적으로 유성을 끌어안았다. 그가 달려가지 못하도록 꽉.


차가 끼이익 소리를 내며 멈췄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차 앞에 주강이 쓰러져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그에게서 짙은 피가 흘러나왔다.


여주의 바람대로 유성은 무사했다. 중년 남자의 돈을 훔치려던 무리는 사고가 나자 도망갔다. 남자는 사고가 났는데도 불구하고 바닥에 흩어진 돈을 줍느라 정신이 없었다. 쓰러진 주강만이 의식을 잃은 채 꼼짝하지 않았다.


유성을 붙든 여주의 손이 떨어졌다. 유성만이 주강에게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도착했다. 주강이 차에 실려 가고 바닥에 흩어진 돈을 모아 움켜쥔 남자는 부리나케 도망간다. 유성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누군가를 다칠게 할 의도는 없었다. 그게 차주강이라고 해도.


병원에 도착해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차주강이 수술실로 들어가서야 분주하던 유성이 멍하니 앉아 있는 여주에게 다가왔다.


“많이 놀랐죠? 다친 곳은 없어요? 의사 선생님께 한번 봐달라고 할까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거세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보듬었다.


“저는 괜찮아요. 선생님은요?”


“난 괜찮아요.”


“다행이다.”


유성의 미소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그것뿐이면 됐다. 그것뿐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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