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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22. 2024

[소설] 10화 아는 애랑 닮아서

여주는 편지를 쥔 채 카페 흐노니의 다락방에 섰다.


“조심해야 할 건 두 가지야. 첫 번째, 편지가 훼손되면 안 돼. 편지가 찢어지는 순간 현재로 돌아와. 통로가 닫히게 돼.”


도욱은 평소와 다른 진지한 얼굴로 신신당부를 했다.


“두 번째, 정체를 들키면 안 돼. 정체를 들키는 순간 다시는 과거로 갈 수 없어. 어떤 편지를 가지고 있든. 그리고 그 과거에서 아무도 누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야.”


“알았어. 명심할게.”


도욱이 나가고 다락방에 혼자 남은 여주는 편지를 꺼내 펼쳤다. 어김없이 환한 빛이 다락방에 쏟아졌다.


“아…….”


환한 빛은 성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여주는 손에 쥔 편지를 꽉 쥐었다. 공간이 일렁이며 벽이 흔들리자 글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나를 구해줘. 나를 구해줘. 나를 구해줘! 나를, 나를…….


그녀를 부르는 메시지. 선생님의 간절한 목소리처럼 여주의 마음을 두드렸다. 곧 환한 빛이 점점 커지더니 그녀를 덮쳤다.


운동장 아래 나무와 나무 사이. 여주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정신없이 굴러떨어지며 도착했던 지난번과 달리 그녀는 차분히 통로를 확인하고 편지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사이 벚꽃잎은 떨어지고 학교는 봄의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다.


여주는 아직도 믿기지 않은 눈으로 과거의 학교를 바라봤다. 저 멀리 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 번에 그녀가 있었던 교실을 찾았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얼얼하면서도 다시 그 시절의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오늘 날짜를 알아야 해.’


마음의 방향과 달리 그녀는 교문을 빠져나왔다. 오늘이 언제인지 알아야 폭행 사건을 막을 수 있다. 여주는 기억을 더듬어 학교 근처 가게를 찾았다. 오늘 날짜를 확인한 후 하교 시간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학교가 한산할 즈음, 선생님을 만날 계획이었다.


‘왜 하필 오늘이 그날이야!’


학교 근처 슈퍼마켓에서 날짜를 확인한 여주는 학교로 뛰었다. 운명의 장난질인지 하필 오늘이 폭행 사건이 일어나는 날이었다.


“선생님이 조퇴하셨다고요?”


과거로 돌아가면 무엇을 해야 할지, 선생님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대책을 세웠건만. 도착하자마자 숨이 차도록 뛰며 유성을 찾아야 했다.


“네, 갑자기 조퇴하셔서요. 그런데 누구신지.”


중년의 교사는 여주도 잘 아는 교사였다. 학생 주임으로 유난히 엄격하고 딱딱한 선생이었다. 특히 투서가 학교에 퍼졌을 때 유성의 징계를 밀어붙이던 사람이었다. 달갑지 않은 인물이지만 여주는 준비한 답변을 차분히 꺼냈다.


“오늘 서유성 선생님과 상담이 있어서요.”


“아, 학부모이신가요?”


“가족입니다. 부모님 대신 왔어요.”


어설픈 변명이지만 중년 교사는 납득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선생이 상담 시간을 잊을 리 없는데.”


“또 차주강 때문에 나간 거 아니에요? 오늘 결석이던 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 교사가 툭 끼어들었다. 차주강의 이름만으로 여주는 미간을 좁혔다.


“제가 서 선생에게 전화해 볼게요.”


중년 교사가 전화를 걸었지만 유성은 받지 않았다. 교사들의 대화로 여주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유성이 고3 주강의 담임을 맡았고, 요즘 가출하며 사고를 치는 주강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거였다.


선생님이라면 주강을 그냥 둘리 없었다. 아무도 여주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다른 선생들도 외면하거나 추문에 수군덕거릴 때 유성만이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 추문이 자신을 괴롭혀도, 교사 생활이 위태로워져도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주는 초조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사건 장소로 가기 위해 학교를 나섰다.


걸음을 서두르는데 가까이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점점 커지는 소리에 그녀는 주변을 흘끔거렸다. 한번 귀에 들어온 소리는 무시하지 못할 만큼 커졌다. 살을 쳐대는 소리, 넘어지며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 낮게 구시렁거리는 남자들의 목소리.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소리의 정체.


그녀는 살금살금 걸으며 소리가 나는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소리가 가까워지자 얼추 대화가 들렸다.


“신경 거슬리지 마라.”


“별것도 아닌 게.”


여주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고개만 내밀었다. 세 명의 남학생 무리가 한 명을 둘러싼 채 발길질을 하며 벽에 밀쳤다. 밀쳐진 한 명은 거칠게 숨을 내뿜었다. 무리에 가려진 탓에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심각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너 다시 한번 꼰지르면 이 정도로 안 끝나. 알았어?”


“꼴에 있는 집 자식이라고.”


“뭣도 아닌 게 진짜!”


무리 중 리더로 보이는 한 명이 주저앉은 남학생의 머리를 움켜잡고는 휙 밀쳤다. 나머지는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학생이 맞을 때마다 여주도 움찔거렸지만 여자 혼자 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럴 시간 없어.’


여주가 구해야 할 건 유성이었다. 다른 이를 도우며 오지랖 부릴 시간은 없었다. 비겁하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나섰다간 그녀가 다칠 수도 있었고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그래, 이번만 넘어가자. 과거로 오자마자 일이 틀어지는 건 싫었다. 여주는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또 도망치는 거야?’


과거에 와서 처음 하는 일이 도망이라니. 유성의 삶을 구하겠다는 결심으로 온 과거. 그 과거에서 처음 하는 게 그녀가 숱하게 해온 도망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무서워 도망쳤을 테지만 지금은 달라지고 싶었다. 여주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경찰 아저씨, 저기에요! 저기 누가 맞고 있어요!”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곧 욕지거리와 함께 일진 무리가 골목길을 뛰쳐나갔다.


다행히 그녀의 방법이 통했다. 안심한 그녀는 쓰러진 학생 쪽으로 달려갔다. 미래에서 온 사람에게 도움을 받다니 저 학생 역시 천운 아닐까. 그녀는 피와 흙먼지로 떡이 된 남학생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어깨를 잡고 살살 흔들었다.


“이봐요, 학생. 정신 차려요!”


“으윽.”


남학생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기 위해 애썼다. 여주는 남학생을 일으켜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괜찮아요? 일단 병원부터 가요.”


괜찮지 않은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기껏 큰마음 먹고 도운 사람이 차주강일 리는 없으니까.


여주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자마자 녀석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는데 주강의 마른 손이 그녀의 바지를 붙들었다.


“도와, 도와줘…….”


여주가 다리를 움직여 뿌리치자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몇 번이나 골목을 벗어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다 결국 주강을 질질 끌고 병원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여주는 자신이 한 행동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누워있는 그를 보니 며칠 전 자신을 속인 이든의 얼굴이 겹쳐졌다. 생각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한심하게도 이 녀석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꼴이라니.


원래 멍을 달고 살았던지라 새삼스러운 것도 없지만 일방적으로 당한 녀석을 보며 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덩치가 아깝다.’


거기에 더해 의사 입에서 연이어 기가 막힌 진단이 나왔다.


“현재 환자는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무슨 실조요?”


영양실조라니. 요즘 시대에, 아니 아무리 12년 전이어도 영양실조가 말이 되는가. 그것도 차주강이 영양실조라니. 녀석과 어울리지 않는 병명에 여주는 연이어 실소를 터뜨렸다.


“쌈박질만 하고 다녔나.”


기절한 건지, 잠이 든 건지 녀석은 링거액을 맞으며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여주는 응급실에서 나와 공중전화를 찾았다. 어디로 전화해야 하나 고민하며 수화기를 집었다 놓기를 반복하다 제자리에 두었다. 학교에 연락을 하자니 일을 키우는 것 같았고 차주강과 더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베풀 수 있는 선심은 다 베풀었다. 더 이상의 책임감도 없었고 오지랖도 떨고 싶지 않았다.


‘아냐. 선생님을 찾지 못한다면 차주강을 따라가는 게 나아.’


뒤늦게 머리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다시 차주강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미처 뒤에 선 사람을 보지 못한 그녀의 코가 남자의 가슴팍에 닿았다.


“죄, 죄송합니다!”


“그쪽이 나 도와줬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사과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차주강이 서 있었다.


“차주, 헙!”


여주가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그를 부를 뻔했다. 지금 그녀는 과거의 구여주가 아닌 서른 살 구여주였다. 정체를 들키면 곤란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요. 괜찮은 거 같으니 가볼게요.”


주강은 여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여주는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저, 저기 잠깐만요!”


몰래 그를 따라가려고 했는데 반대로 그에게 쫓기게 되었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느라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잠깐만요!”


누가 더 인내심과 끈질김을 발휘하는지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강은 그녀를 부르며 계속 쫓아왔다.


“언제까지 쫓아 올 거야?”


참다못한 여주가 몸을 획 돌려 소리를 질렀다. 주강이 멈칫하며 섰다. 빤히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대답은 하지 않고 그는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상처 난 손으로 몇 번이나 눈을 비비다 그녀를 바라본다.


“죄송해요. 아는 애랑 닮아서.”


쿵,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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