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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18. 2024

[소설] 09화 당신의 과거

- 서유성, 11년 전에 학교 관뒀어.


차주강이 일으킨 파장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도욱에게 연락이 왔다.


“선생님이 학교를 관두다니.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유성에게 선생님이란 천직이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선생님은 그의 외모와 다정함에도 있었지만 상담 선생님으로서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귀 기울이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유성이 학교를 관뒀다는 말에 차주강이 떠오르며 불길했다.


- 기사 하나 보내줄게.


여주는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도욱이 보내준 기사 링크를 확인했다.     



취객 금품 노린 일진 폭행, 말리려는 교사 의식 잃어

금품 갈취를 노린 10대 4명이 취객을 폭행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회화 경찰서는 금품을 노리고 지나가는 취객을 상대로 폭행과 절도를 일삼은 A군 등 4명을 구속하고…… 폭행을 목격한 교사 B씨는 A군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     



“이 기사에 교사가 선생님이라는 거야?”


도욱의 침묵은 긍정을 뜻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여주의 묻는 목소리가 크고 빨라졌다. 도욱은 진정시키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다리를 다쳤어. 그 후 학교를 관둔 거야.


핸드폰을 잡은 손에 땀이 날 만큼 긴장한 채 여주가 물었다.


“못 걷게 된 거야?”


다정히 웃으며 상담실에 오는 아이들을 반기는 선생님이 떠올랐다. 여주가 소리 없이 울 때 다독여준 것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민 것도 모두 유성이었다. 그런 유성에게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손이 떨렸다.


- 한쪽 다리를 전다고 하던데, 교사 생활을 못 할 만큼은 아니라고 했어.


여주는 기사의 날짜를 확인했다. 유성의 답장이 느려진 시기와 겹쳤다. 선생님이 바빠서라고만 생각했다. 여주도 대입 준비로 편지는 서서히 머리에서 잊혔다. 그사이 벌어진 일. 선생님이 겪었을 고통을 모르고 지나갔다는 죄책감이 들어 여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 그 폭행 사건 말이야. 무리 중 한 명 이름이 익숙하더라고.


도욱은 계속 말을 이으며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말했다.


- 차주강. 누나가 과거에서 만난 사람, 맞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차주강의 이름이 여기서 또 튀어나오는 걸까. 그가 또 누구 인생을 뒤흔든 걸까.


- 차주강은 그 후 외국으로 떠나고 서유성은 학교를 관뒀어.


도욱은 마지막으로 유성의 연락처와 주소를 알려줬다. 몇 번이나 심호흡하며 마음을 안정시킨 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무수히 들릴 뿐, 유성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12년 전 전학을 가며 여주는 모든 게 끝나길 바랐다. 무성한 소문도, 괴롭힘도 없어지길 바랐다. 제 편을 들어주던 친구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똑같이 괴롭힘을 당했다. 유일하게 의지가 되던 유성은 몹쓸 소문에 징계 직전까지 갔다. 여주가 버티면 버틸수록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떠나는 걸 선택했다. 그게 어린 여주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떠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지만 해결된 건 없었다. 차주강은 일으킨 파장은 그녀의 과거에도, 현재도 멈추지 않았다.   

  






가파른 언덕길은 얼마 전 내린 눈으로 얼어붙어 미끄러웠다. 여주는 빙판길을 조심스럽게 걸으며 언덕을 올랐다. 동네는 눈에 꽁꽁 얼어붙어 한기가 가득하고 고요했다. 유성이 사는 곳은 회화에서 한참 떨어진 지방이었다. 버스를 타고 내려가서도 시내와 떨어진 외곽으로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 타며 가야 하는 낯선 지역의 낯선 동네였다.


언덕을 오르고. 복잡한 골목길을 여러 번 지나자 마침내 유성이 사는 낡고 오래된 반지하에 도착했다. 여주는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주소를 확인했다. 학교에서 항상 왕자님으로 불리던 선생님. 선생님의 단정하고 반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유복하게 자랐을 거로 추측했다. 특히 그가 관리하는 상담실은 항상 깔끔했고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기에 지금 도착한 곳이 선생님이 사는 곳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여주도 반지하와 옥탑방을 오가며 살았기에 그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얼마나 힘든 삶을 산 걸까. 자꾸만 드는 암담한 생각에 문을 두드릴 용기조차 없어 망설일 때 삐거덕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다리를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 한겨울 바람을 막기엔 턱없이 부족한 얇은 점퍼, 누더기 같은 옷과 해진 신발, 술 냄새와 뒤섞인 악취. 길에서 스친다면 절대 유성인지 모를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서유성 선생님?”


구부정한 자세로 걸으며 고개를 바닥으로 향한 유성이 움찔거렸다.


“선생님 맞죠? 저 여주에요. 구여주.”


“사람 잘못 봤습니다.”


유성이 피하자 여주가 따라가며 그를 불렀다. 아무리 부정해도 이제 그는 부정할 수 없는 유성이었다.


“선생님, 저예요!”


유성은 학생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따뜻하고 학생들에게 의지가 되어준 선생님. 어린 구여주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어른. 그런 유성이 지금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며 여주를 피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누가 선생님을 이렇게 만든 거예요?”


울음이 터졌다. 왜 회화를 떠났는데. 어떤 마음으로 떠났는데.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들이 피해를 보는 게 싫어서, 소문 때문에 선생님이 다치는 게 싫어서. 자신이 사라져야 모든 게 끝날 거라 믿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거라고.


“차주강 때문이죠? 차주강이 이렇게 만든 거죠?”


문제의 시작엔 언제나 차주강이 있었다. 누군가의 불행엔 언제나 그 녀석이 있다. 타인을 불행으로 밀어 넣고 혼자서 멀쩡히 나타나 자신을 조롱하는 차주강. 더는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아악!”


유성이 갑자기 악을 쓰며 머리를 감쌌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빛이 분노로 차올랐다.


“서, 선생님.”


그의 돌변에 여주는 다가가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무서웠다. 누구보다 다정했던 사람의 변화는 위협적이었다. 유성이 그녀를 알아보는지 아닌지 알 수조차 없었다.


“저리 가! 꺼져!”


유성은 주변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마구잡이로 잡아 던졌다.


“선생님! 저예요, 저! 여주에요!”


무차별적으로 날아오는 쓰레기를 팔로 막으면서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유성은 미친 듯이 손에 잡히는 대로 던졌다. 그게 종잇조각이든, 날카로운 물건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아악!”


묵직한 무언가가 날아와 여주의 이마를 긁었다. 여주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서진 의자를 유성이 집어 들었다. 피할 틈 없이 여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악! 이거 놔!”


유성의 비명에 여주가 눈을 떴다. 생각지 못한 인물이 유성을 제압하며 의자를 한구석으로 던졌다.


“괜찮아?”


“네, 네가 어떻게…”


도욱이 유성의 두 팔을 붙잡은 채 씩 웃었다.


“예감이 적중했달까.”


도욱은 영화 속 장면처럼 유성을 한 번에 기절시켰다. 그 장면을 그대로 목격한 여주가 놀라서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 도욱은 바닥에 쓰러진 유성을 반지하로 데려가 눕혔다.


집은 엉망이었다. 어둡고, 곰팡이가 벽면에 가득했다. 항상 커피향을 풍기던 선생님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빈 컵라면 용기와 술병들이었다.


“아무래도 기가 막힌 타이밍에 왔단 말이지. 나한테도 찾아온 것처럼 무턱대고 서유성 찾아갈 것 같았거든.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안전한 건 아니야.”


반지하를 나서며 도욱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가벼운 능청을 떨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여주는 골목을 벗어나 도욱의 차가 세워진 곳으로 가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여주는 사직서 하나만 준비한 채 출근했다. 매일 반복되던 자질구레한 일상도 그녀의 손을 떠날 것이다. 차주강은 항상 이렇게 그녀의 일상을 망쳤다. 많은 걸 바라지 않았는데. 그 흔한 일상조차 누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더 참을 수 없는 건 유성의 삶이었다. 도망치듯 회화를 떠나면서 바란 건 유성과 친구들의 행복이었다. 특히 자신 때문에 유성의 교사 인생에 피해가 갈까 봐 두려웠다. 그가 항상 좋은 선생님으로 남길 바랐다. 그런데 결말은 바뀌지 않았다.


주강 앞에서 사직서를 던지고 싶었다. 이제 몰래 도망가는 건 지쳤다. 그런 마음으로 사직서를 품은 해 회사에 도착했지만 유난히 공기가 을씨년스러웠다. 지나치는 사람마다 흘끔거리며 수군거렸다. 그 익숙한 공간에 낯선 공기가 흐르는 순간의 변화는 십여 년 전의 교실과 닮아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녀의 자리를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여주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여주 씨.”


여주를 알아본 김 대리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제야 그녀의 자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빨간 글씨. 12년 전 책상을 도배하던 낙서가 그녀의 사무실 책상에 가득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선생과 놀아나는 문란한 학생을 엄벌해 주세요!’


책상과 의자에 덕지덕지 붙은 종이는 12년 전 학교에 도착한 투서였다. 교사인 유성과 학생인 여주의 관계를 의심하던 투서. 여주는 정신이 아득해져 몸을 휘청였다. 보낸 사람도 뚜렷하지 않았던 투서는 살인자의 딸도 범죄자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그녀가 당한 일 중 가장 악의가 가득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최 과장이 소리치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여주는 굳은 채 서 있었다. 귓가가 윙윙거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의 대화가 오갔지만 어느 하나 귀에 닿지 않았다. 12년 전 불특정 다수의 악의는 18살 구여주의 마음을 할퀴고 삶을 뒤흔들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몰랐다. 반 아이들도, 선생들도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 그래서 도망쳐야 했다.


이제는 저 악의 어린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안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여주는 팀장의 자리로 가 미리 준비한 사직서를 꺼내 책상에 내려놓았다.


“구여주!”


회사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손을 누군가 낚아챘다.


“네가 왜 그만둬? 뭘 잘못했다고?”


차주강의 손에 사직서가 구겨진 채 들려있었다.


“이거 놔!”


그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며 노려봤다.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네가 한 짓이잖아!”


“아니야.”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처음부터 날 밝히지 않은 건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그 말을 믿으라고? 난 이제 18살이 아니야.”


네가 아닐 거라고 믿었던 18살. 얼마나 후회하고 살았던가.


“내가 밝혀낼게. 범인 잡을 거야.”


“네 마음대로 해.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거니까.”


여주는 그대로 돌아섰다. 살인자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끊어낼 수 없다면, 어차피 망가진 삶이라면 다른 이의 삶을 지켜낼 거라고 결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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