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에 놓인 커피를 발견한 여주는 팀장 자리를 흘깃 바라봤다. 커피를 준 사람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한 남자가 가져온 균열은 여주 앞에 놓인 커피처럼 온화한 일상을 여주에게 가져왔다. 그가 나타난 후로 아침마다 습관 하던 일들이 사라졌다.
이미 환기를 마친 사무실은 따뜻했고, 탕비실은 깨끗했다. 팀원들은 이든의 눈치를 보며 각자 커피를 사 와서 마시고 여주에게 숱하게 시키던 심부름도 줄었다. 제일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이든으로 인해 여주의 잡무는 하나씩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디자인 업무가 많아졌다. 이든은 팀원의 의견을 묻거나 작업 상황에 관해 확인 할 때마다 여주를 빼놓지 않았고 그녀가 작업한 디자인을 유심히 살폈다.
“여주 씨도 이번 프로젝트에 디자인 낼 거죠?”
그녀가 작업한 디자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상태로 그가 물었다.
“저요?”
“여주 씨도 우리 팀원이니까요.”
그의 당연하다는 태도에 말문이 막힌 건 여주였다. 그동안 그녀의 디자인은 채택되지 않았다. 그녀가 제출한 디자인은 채택되어도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올라갔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괜찮아도 작업물이 좋아도 결과물은 메인 디자이너의 몫이 되었다.
“같이 해봅시다, 우리.”
2년 가까이 일했지만 이곳에서 여주를 ‘우리’에 끼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 탓만은 할 수 없었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벽을 세운 건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곁을 내주지 않았다. 가까워져도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튀어나오면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돌아섰으니까.
들키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선택한 건 어떤 관계도 만들지 않는 거였다. 그래서 항상 겉돌았지만 감수했다. 무시를 당하고 그녀의 디자인이 남 좋은 일만 시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면서.
‘그냥 닮은 사람일까.’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단호하고 그녀를 몰아붙일 때면 차주강이 떠올랐지만 그녀를 가장 배려하고 노력을 인정하는 것도 그였다. 그는 객관적이었다. 오히려 개인적인 감정을 내세우고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여주였다.
‘차주강이 아닌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은 바뀌었다. 이든을 지켜볼수록 그녀의 기억 속 차주강과 매우 달랐다. 어딜 가나 중심에 서는 사람, 호감을 얻는 인물. 이제는 오히려 여주가 그를 지켜보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했지만 다시 그에게로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후에 외근이니까 준비해.”
최 과장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끔 외근에 여주를 데려가곤 했다. 특히 오늘처럼 오후에 외근을 나가는 경우엔 여주에게 일을 떠넘기고 이른 퇴근을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담배 피우고 갈게. 카메라 챙겨서 주차장에 가 있어.”
남자 직원들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최 과장을 보며 남은 오후가 피곤하겠구나 싶으면서도 잠시라도 이든의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위안으로 삼았다. 여주는 카메라를 챙겨 주차장으로 내려가 최 과장 차 앞에서 기다렸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최 과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원래 굼뜬 사람이긴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전화하려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와요.”
발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여주는 멈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최 과장님은요?”
“최 과장은 다른 일이 있어서 내가 갈 겁니다. 나랑 같이 가기 싫어요?”
또 그 시선이다. 빤히 바라보는 그 눈빛. 차주강을 기억나게 하는 시선.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불편해요?”
침묵을 가르고 들린 목소리에 여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아니면 내가 싫은 건가.”
기분 나쁜 내색보단 혼잣말에 가까웠다. 오히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말은 그 뜻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여주는 대답 대신 입속에 맴돌던 질문을 꺼냈다.
“한국 이름 있어요?”
“드디어 나한테 궁금한 게 생겼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물은 질문에 그는 싱긋 웃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됐어요. 한국 이름은 있었지만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죠.”
의외의 이야기에 여주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주강의 부모는 회화의 지역 유지였다. 그런 그가 입양될 확률이 있을까?
“그 이름을 다시 찾는 게 나은 건진 모르겠어요.”
항상 여유롭던 그의 미소가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동안 피해의식이라도 생겨버린 걸까. 괜한 사람을 의심한 걸까. 이든만 보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복잡한 속내에 비해 외근은 무난했다. 오히려 최 과장과 다니는 것보다 효율적이고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보며 업체를 만나고 사진을 찍고 업무 조율을 하다 보니 혼란스러운 마음도 뒤로 밀려났다.
마지막 미팅 장소는 레스토랑 ‘리스토로’였다. 리스토로는 이든의 지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내부 인테리어에 그의 가구가 사용되었다. 아직 국내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은 가구가 처음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해 홍보자료에 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두 사람이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중년 남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이든, 드디어 비싼 얼굴 보여주는 거야?”
“그렇게 됐어요. 이쪽은 같이 일하는 구여주 씨입니다.”
“반가워요! 크리스 한입니다.”
레스토랑 사장 크리스는 넉살이 좋은 중년 남자로 이든과 절친한 사이로 보였다. 능글맞지만 충분히 호감을 살만한 외모와 언변을 가진 그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브레이크타임을 이용해 레스토랑 곳곳을 여주에게 소개했다.
“이곳 가구는 모두 이든의 솜씨죠. 저 작은 인테리어 소품 하나까지도요.”
크리스는 마치 이든의 부모처럼 가구를 보며 뿌듯해했고, 그의 훌륭한 솜씨를 칭찬했다. 이든은 그만 좀 하라면 크리스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레스토랑 사장 앞에서 한층 편해 보이는 얼굴을 했다.
“이든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여주 씨도 같이하실 거죠?”
“저는 괜찮습니다.”
크리스는 한국어가 능숙하지만 외국인의 억양이 묻어났다. 아마 미국에서 만난 사이일 거로 추측하며 여주는 천천히 레스토랑의 가구 사진을 찍었다.
‘이게 이든의 가구.’
미리 자료를 통해 그의 가구를 봤지만 실제로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레스토랑의 분위기에 맞춰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함보단 단정하고 깔끔했다. 곳곳에 배치된 목각인형은 동화 속에나 나올 것처럼 따뜻하면서도 장난스럽기까지 했다.
‘그 녀석도…’
문득 어린 주강이 떠올랐다. 그 녀석도 손으로 나무 조각을 매만지며 만드는 걸 좋아했었는데. 미처 떠올리지 못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구여주?”
어렴풋이 떠오르려던 기억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금세 먼지처럼 흩어졌다.
“구여주 맞네.”
갑자기 맞닥뜨린 얼굴은 한때 미래를 약속했던 남자였다. 그 남자 뒤에는 가끔 봤던 그의 친구들이 함께였다.
“오랜만이다.”
그의 인사는 건조했고 뒤에선 친구들은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잘 지내나 보네.”
잘 지내지 못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죄인이 되길 자처한 건 여주였다. 결혼식에서 혼자 남은 그가, 도망가는 신부를 지켜보던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생각하면 괴로웠다. 그래서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잊어버리길 바랐다. 2년이나 지났지만,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나 먼저 가볼게.”
“얘기 좀 해.”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여주는 그대로 레스토랑 밖으로 나갔다.
“여주야, 잠깐만!”
도망가봤자 고작 레스토랑의 주차장이었다. 그 뒤를 그가 쫓아왔다. 여주가 멈추자 그도 거리를 유지한 채 섰다.
“난 할 얘기 없어.”
여주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번호 바뀌었더라. 알려줘. 연락할게.”
“우리 연락할 사이 아니잖아.”
우연한 만남에 그저 재수가 없었다며 무시해 주길 바랐다. 상처 준 만큼 미워하길 바랐다.
“너 나한테 그러면 안 되잖아. 이유라도 말해줘야 하잖아.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미안해.”
“나 아직도 몰라. 네가 그날 왜 도망갔는지. 날 사랑하긴 했니?”
그와의 연애는 평범했다. 누구보다도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연애이기에 만족했다. 뜨거운 열정이나 죽고 못 살 거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여주에게 평범한 일상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녀 앞으로 과거를 들먹이는 편지가 도착했다. 결혼식장에서 망신을 줄 거란 내용이 있었다. 그녀가 꿈꾸던 미래는 단숨에 부서졌다. 살인자의 딸이라고 고백하지 못했다. 그 말 한마디에 변할 남자가 두려웠다.
“가야 해.”
비겁하단 걸 알면서도 입술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앞을 막아서며 그가 팔을 잡았다.
“결혼식 전에 이상한 편지가 왔어. 네 과거와 관련된 편지였어.”
편지라는 말에 여주의 걸음이 멈칫했다.
“편지라니?”
“투서였어.”
순간 현기증이 일어 여주가 비틀거렸다. 그가 다가와 붙잡으려 하자 다른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싫어하는 거 안 보입니까?”
이든이 한 손으로 남자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여주에게서 떨어뜨렸다. 남자보다 한 뼘은 더 큰 이든의 등장에 그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요?”
이든이 조심스럽게 여주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의 등장은 달갑지 않았다. 보이고 싶지 않은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끝나지 않던 상황을 그가 끝내줬다는 사실이다. 남자는 실망 어린 눈을 하곤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섰다.
“갑시다. 급히 가볼 곳이 있어요.”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지만 이든은 남자에게서 여주를 보호하듯 안쪽에 세워 차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차를 타고 주차장에서 벗어나며 백미러로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보자 착잡했다.
“급히 갈 곳이 어디예요?”
레스토랑 사장과 저녁 약속이 있다던 그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녀의 질문에도 묵묵히 운전만 할 뿐. 그의 대답을 기다리길 포기하고 창밖을 바라봤다.
“그쪽 얼굴이 불편해 보이길래.”
무심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창밖에 두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도와준 건가. 차주강일지도 모를 남자가? 그럼 다 들었을까. 어디까지 들었는지, 아니,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을 그에게 들켜버린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