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운전하는 그의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눈은 저절로 오른쪽 눈썹 끝에 달린 흉터로 향했다. 주강에게는 없던 흉터지만 여주가 전학 간 사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은 항상 상처를 달고 살았으니까. 그 외에는 어린 주강과 달리 멀끔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오히려 제가 팀장님을 불편하게 해드린 거 같아서요.”
“그 남자, 누군지 물어도 됩니까.”
그의 질문에 그녀는 머뭇거렸다.
“곤란하면 대답 안 해도 됩니다.”
그의 질문에 되묻고 싶었다.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고.
“제가 잘못한 사람이요. 전 그런 사람이 많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를 싫어했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죄도 많아졌나 봐요.”
어느새 어둠이 내린 하늘에서 흰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짧은 침묵 사이를 핸드폰 벨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의 미간이 좁혀지며 시선은 차 유리 위에 떨어지는 눈으로 향했다.
“하, 알겠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고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무슨 일 있으세요?”
“내일 공방으로 올 가구와 자재들이 있는데 일정 착오로 지금 도착했다는군요. 사람이 없다고 무작정 두고 간다네요.”
“가족한테 연락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족, 없습니다.”
얼핏 그의 대답에 머뭇거림이 보였다.
“공방부터 가세요. 저는 적당한 데서 내려주세요.”
“괜찮으면 같이 갑시다. 마침 급히 가볼 곳이 생겼으니까.”
여주가 머뭇거린 사이 차는 그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이 공방은 3층짜리 넓은 정원을 가진 주택이었다. 대문 앞에는 자재로 보이는 짐들과 가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젠장.”
돈 주고 사지도 못하는 가구와 고급 자재들이 대문 앞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대문을 열고 자재들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여주는 망설이다 그를 돕기 위해 가구들을 안쪽으로 옮겼다. 그가 한쪽에 있던 비닐 천막을 꺼냈다. 여주는 자동으로 반대편으로 가 천막의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혼자 할 수 있어요! 작은 짐들만 옮겨줘요.”
“같이 하는 게 빨라요!”
천막의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여주는 이든의 큰 키에 높이를 맞추느라 낑낑거렸다. 발뒤꿈치를 들고 팔을 위로 쭉 펴서 눈에 덮이지 않도록 씌웠다. 정작 두 사람의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저 소품들 안으로 옮겨줄래요?”
그가 가리키는 곳엔 아기자기한 목공예품들이 처량하게 눈을 맞고 있었다. 여주는 품에 소품을 끌어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미리 열어둔 문안으로 쏙 들어가자 아직 정리가 덜 된 작업공간이 나왔다. 그녀는 넓은 작업대에 소품을 올려두었다. 그도 작은 가구들을 안으로 옮겼다. 두 사람은 바삐 움직이며 몇 번을 반복해서 최대한 짐들을 안으로 옮겼다.
서두른 탓일까. 눈으로 미끄러워진 길에 그만 여주의 발이 헛나가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신음을 흘렸다. 놀란 이든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왔다. 천막과 가구가 뒤엉킨 사이로 여주의 두 다리가 삐죽 튀어나왔다.
“구여주!”
그의 목소리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괜찮아? 어쩌다… 일단 나 좀 잡아봐.”
“그냥 좀 미끄러진 것뿐, 으윽.”
여주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 휘청거렸다. 그가 급하게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미끄러질까 봐 조심하며 공방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부터 갑시다.”
“괜찮아요.”
의자에 앉으며 인상을 쓰면서도 여주는 괜찮다는 말만 했다.
“좀 쉬면 돼요. 닦을 거 좀 주세요.”
“아, 미안해요.”
처음으로 이든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두리번거리며 수건을 찾던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위를 가리켰다.
“올라갑시다. 3층이 집이에요.”
마당을 가진 3층 주택은 낡고 오래된 집이지만 겉보기에도 넓고 튼튼하게 지어진 집이었다. 1층은 창고와 공방으로 나뉘었는데 큰 기계들이 들어서 있었다. 2층은 1층 공방보다 작은 작업실로 그가 주로 혼자 아이디어 구상을 하거나 간단한 작업을 하는 공간이었다.
“잡아요.”
오래된 집은 내부 계단이 없었다. 여주는 고개를 들어 맨 꼭대기 층을 바라봤다. 그의 사적인 공간이 있을 3층이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그새 눈이 쌓인 바깥 계단은 미끄러운 상태였다. 이든은 한쪽 팔로 여주의 몸을 받친 채 뒤에서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조심해요.”
발을 딛자 발목이 시큰거렸다. 그가 어깨를 내줬지만 여주는 편히 몸을 맡기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몸이 닿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이 가 통증이 더 심해졌다.
“결벽증 있어요?”
“뭐라고요?”
그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가 눈을 흘기며 되물었다.
“아니면 나한테 기대요. 같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고 싶지 않다면요.”
그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맞닿았다. 괜한 고집을 세우면 몸도 고달플 게 뻔하니 순순히 몸을 맡겼지만 곧 다른 문제가 생겼다.
젖은 겉옷을 벗은 게 문제였다. 몸과 몸이 밀착되자 그의 존재가 더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의 단단한 팔 근육과 어깨는 듬직하게 그녀를 바쳐주었지만 안심되기보다 긴장으로 몸이 더 빳빳해졌다. 젖은 옷은 신경 쓰이고 맞닿은 체온은 뜨겁기만 했다.
“괜찮습니까?”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한 탓에 여주의 발이 살짝 미끄러졌다. 계단 난간을 잡고 있던 그가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괘, 괜찮아요.”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워 여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한번 의식을 하니 몸이 맞닿은 부분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아 화끈거리고 젖은 블라우스에 닿은 손은 델 듯 뜨거웠다. 분명 겨울이건만 두 사람을 에워싼 공기는 열기로 달아올랐다.
두 사람 다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둘 사이로 흐르는 긴장감은 계단의 길이를 더 늘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현관문이 보이자 여주는 바로 몸을 뗐다. 이든은 헛기침을 하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한층 안정된 공기가 흘렀다. 어수선한 작업실보다 정돈된 집안이 눈에 들어왔다.
“저쪽이 욕실이에요.”
여주가 욕실로 향하자 이든이 수건을 챙겨 건넸다.
“좀 크겠지만 갈아입어요.”
그가 건네는 옷을 받아 든 여주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려요.”
그의 말에 여주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욕실로 들어가 수건으로 몸을 닦고 긴 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다. 그에게는 작아 보이는 옷이지만 여주에게는 커서 한쪽 어깨가 흘러내렸다. 내려간 옷을 끌어 올리며 거실로 나갔다.
그가 들어간 안방의 문이 약간의 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그의 맨몸이 보였다.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얼핏 보이는 그의 흉터에 멈칫했다. 오른쪽 팔뚝에 난 큰 흉터와 허리 쪽에 수술 자국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말끔한 겉모습에선 상상할 수 없는 자국들이 그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리 정말 괜찮아요? 병원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여주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마세요. 옷은 깨끗하게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눈 그치면 데려다줄게요. 좀 쉬어요.”
“정말 괜찮, 에, 에취!”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몸이 후끈거렸는데 어느새 찬기가 으슬으슬 올라와 재채기가 났다.
“몸이라도 녹이고 가요.”
달그락 소리와 함께 물 끓는 소리가 조용한 집안을 채웠다. 그에게서 찻잔을 받아 든 여주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도 찻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두 손으로 잡은 찻잔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고 향이 올라와 코끝을 간질였다.
여주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오렌지 향이 은은히 나는 홍차였다. 그가 한쪽에 있던 동그란 상자를 꺼냈다. 과자 상자였다. 그는 과자 상자를 여주 쪽으로 슬쩍 밀었다.
여주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헛기침했다. 여주는 초콜릿 과자 하나를 입안에 쏙 넣었다. 초콜릿이 입안에서 녹으며 단맛이 퍼지자 몸의 긴장도 풀렸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는 말이 없었고 차를 홀짝이는 소리와 과자 깨무는 소리만이 났다. 갑자기 머리가 따끈따끈해지며 열이 올라왔다. 뜨거운 차를 마셔서 그런가. 차만 마시고 일어나야지. 눈이 그쳤으려나. 머릿속에 생각이란 것들이 붕붕 떠다니다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눈이 그친 하늘엔 어둠이 내렸다. 싸늘한 기운에 여주는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하다 이든의 집이라는 것이 떠오르자 누웠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마에서 수건이 툭 떨어졌다. 여주는 소파가 아닌 침대 위에 있었다. 그의 방이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자 열이 내려 미지근했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던 사람 집에서 병이 나버리다니. 기가 차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한동안 잠을 못 자긴 했지.”
편지를 받은 날부터 긴장의 나날이 이어졌다. 카페 흐노니에서 과거로 가는 엄청난 일을 겪고, 차주강의 얼굴을 한 이든을 만나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여주는 살며시 다리를 움직였다. 삐끗했던 발목의 통증도 가라앉았다.
“방이 썰렁하네.”
커다란 방에는 큰 침대가 가운데를 차지했고 작은 서랍장이 전부였다. 가구가 별로 없는 상태라 안락하기보다 허전했다. 여주는 괜히 방을 한 번 더 둘러봤다.
“깼어요?”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여주가 돌아오자 그가 쟁반에 죽을 들고 들어왔다.
“약이랑 죽 사 왔어요.”
이 남자는 왜 이리 다정한 걸까.
“일단 먹어요. 잔소리든 뭐든 나중에 하고요.”
그가 먼저 물을 들이밀었다. 여주도 기운이 없어 포기하고 순순히 받아 물을 마시고 그가 내민 쟁반을 받아 숟가락을 들었다.
“내일은 병원부터 가요. 출근하면 쫓아낼 겁니다.”
여주가 당황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주가 죽을 넘기곤 숟가락으로 한 숟갈 더 퍼 올리며 물었다.
“왜 잘해주세요?”
“내가 그렇게 몰인정한 사람으로 보여요?”
“모르겠어요.”
구여주에게 이든은 어긋난 퍼즐 조각이다. 아무리 방향을 돌리고 노력해 봐도 맞춰지지 않는 퍼즐 조각. 그가 차주강이든 아니든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의 등장만으로 그녀의 움켜쥔 상처를 벌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외면해 왔고 피하고만 싶었던 존재가 지금은 반대로 마음을 물렁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세운 건 굳건한 벽이 아니라 한순간의 다정에도 쓰러질 모래성이었을까. 단단하게 조였던 마음을 풀고 싶은 게 숨겨둔 진심일지도 몰랐다.
“팀장님은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았어요.”
이번에는 여주가 그의 눈을 주시했다. 이든 역시 물러서지 않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그게 누굽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 녀석이 아닐지도 몰라. 그저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이름 정말 없어요?”
마른침을 삼키고 오직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정말 나를 몰라요? 사고 때문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던가.”
“내가 대답하면 우리 관계가 달라지나요?”
기대와 낙담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가 온전히 그녀를 담았다.
“내가 차주강이라면 날 다시 피할 건가요?”
막상 들은 답변에 그녀의 심장이 밑바닥으로 떨어질 듯 곤두박질쳤다.
“차주강이 맞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가라앉는 눈빛이 긍정을 뜻했다.
“어, 어떻게…”
여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소리쳤다. 떨림을 참는 입술에서 경련이 일었다.
“네가 도망갈 거 같아서.”
그의 까만 눈동자가 지난날을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저 까만 눈동자가 외면했던 나날들. 저 눈빛에 상처받은 순간들. 그의 머뭇거림에 배신당한 기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왜, 왜 나를 속인 거야?”
그의 의도는 나쁜 쪽으로만 예상되었다. 언제까지 숨기려 했을까. 혼란스러워하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저 장난감처럼 놀아나는 모습에 비웃은 걸까. 비참해져 여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너야? 글 올린 거?”
“글?”
“하! 그래, 너였구나. 네가 범인이었어.”
모든 게 딱딱 들어맞았다.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글, 팀장으로 나타난 차주강. 오랜 시간 그녀를 쫓아다닌 꼬리표를 퍼뜨린 사람.
“다 알고 있으면서 구경하니까 좋았어? 널 보고 헷갈리는 날 보고 재밌었니? 아니면 내가 널 피하는 걸 보고 통쾌했어?”
그녀가 울분에 찬 말을 토해내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또 모른 척하는 거야? 그때처럼?”
여주의 말에 그가 움찔거리며 머뭇거렸다.
“이제 연극 할 필요 없어. 네 목적은 다 이뤘잖아. 네 앞에서 온갖 우스운 꼴은 다 보였으니까!”
“넌 여전히 날 원망하는구나.”
왜 슬픈 얼굴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슬픔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원망인지, 연극을 들킨 실망 때문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게. 여전히 넌 최악이고.”
나쁜 자식, 개자식. 욕설을 퍼부어야 하는데 눈물만 흘렀다. 시간은 아무리 지나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였고, 배신을 당한 사람은 그녀였다. 그런데 되려 그 녀석이 억울한 눈을 했다. 녀석은 변하지 않았다.
여주는 그대로 그의 집을 나섰다. 여주가 나가자 그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대맡에는 죽이 차갑게 식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