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파 Oct 10. 2024

[소설] 05화 눈동자가 닮은 남자

“지금 와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다들 새로운 팀장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디자인팀이 나뉘기 전 새로 온 팀장이 임시로 전체를 총괄하며 자기 팀을 따로 꾸릴 거라는 말이 오갔다. 겉으로 티는 안 내지만 내심 직원들은 새 팀장의 눈에 들길 기대하는 눈치였다.


곧 본부장이 한 남자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하자 본부장이 기분 좋은 얼굴로 옆에 선 남자를 소개했다.


“소개할게요. 우리와 함께하게 된 새 팀장 이든 화이트 씨.”


“이든 화이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은 제일 먼저 혼자 우뚝 솟아있는 남자에게 놀랐다. 모두가 그를 올려다봐야 할 만큼 큰 키에 다부진 어깨를 가진 남자는 위압감을 주면서도 얼굴선은 유려하게 미끄러지며 이목구비가 빼어난 미남이었다. 위압과 호감이 한데 섞인 남자는 등장만으로 사무실 분위기를 바꾸었다.


“우리가 모셔 오려고 힘 좀 많이 썼어요. 다들 인사해요.”


흡족한 본부장의 말에 뿌듯함이 엿보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져 너도나도 새 팀장에게 앞다투어 인사를 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구여주만 제외하고.


‘말도 안 돼.’


남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그녀가 입을 벙긋거렸다. 낯선 남자의 얼굴 위로 아는 얼굴이 겹쳤다. 그녀는 이 얼굴을 며칠 전에 봤다.


‘아닐 거야.’


겉모습도, 분위기도 달랐지만 차주강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십여 년이나 지났지만 그녀에겐 고작 지난밤의 일이기에 그의 얼굴이 또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멍과 상처를 달고 살았던 얼굴은 깔끔하고 단정했지만 과거의 얼굴을 지우진 못했다.


여주는 도망치듯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가 계단을 올랐다. 숨이 가빠왔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옥상 문을 열고 달려가 난간에 몸을 기댔다. 심장이 터질 듯 쿵쿵 뛰어올랐다. 남자는 지난밤 그 녀석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슴에 상흔처럼 새겨진 이름, 차주강. 낯선 이름의 남자는 과거에서 봤던 그 녀석의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여주는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난간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잘못 본 거겠지 싶었다. 아니, 그러길 바랐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왜 하필 지금일까. 이상한 편지를 받고, 회사엔 그녀의 소문이 올라온다. 과거에선 그 녀석을 만난다. 그 후 나타난 차주강의 얼굴을 한 남자. 모든 것이 맞물린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것처럼 그녀를 12년 전으로 데려갔다.


“아까 인사를 못 드려서요. 이든입니다. 반가워요.”


겨우 사무실로 돌아온 여주에게 남자는 성큼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건넸다. 여주는 그가 뻗은 손을 바라보다가 긴장 어린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여주는 긴장 어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가까이 본 그의 얼굴에서 유난히 상처가 돋보였다. 눈썹 위에 난 흉터. 매일 상처를 달고 살았던 차주강이지만 그 녀석에겐 없던 흉터였다.


“구, 구여주입니다.”


간신히 인사를 내뱉었지만 그가 내민 손까진 잡지 못했다. 그는 민망해진 손을 거두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지만 부드럽게 올라간 입매와 달리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봤을 뿐. 그 눈동자가 유독 차주강과 닮아 있었다.  

   




     



책상 서랍에 책을 넣다 무언가 툭 걸렸다. 서랍 안쪽을 힐끔거리다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잡힌 건 나비 문양이 새겨진 나무로 만든 머리핀이었다. 여주는 뒤를 돌아봤다. 빈자리의 주인이 보이는 거처럼 여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음에 걸렸나 보네.’


여주는 긴 머리를 올려 머리핀을 꼽았다. 아빠에게 선물 받은 머리핀이 망가져 속상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열 마디 물으면 한마디 겨우 대답하는 녀석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니 배시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찾았다.”


교실 밖, 반창고를 붙인 녀석이 저 멀리 보인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여주는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


들릴 리 없음에도 여주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주강아, 고마워!”


“나 때문에 망가졌잖아.”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여주가 휙 고개를 돌렸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 있던 주강이 어느새 뒷자리에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어?”


당황한 여주는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풍성하던 꽃나무는 어느새 바싹 말라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하늘은 비가 내릴 듯 까만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언제 왔어?”


“나 계속 여기 있었어.”


“내가 착각했나 봐.”


고개를 갸우뚱하던 여주는 민망한 웃음을 짓다가 손으로 머리핀을 향했다.


“네가 준 거 맞지? 고마워.”


“고맙긴. 다 망가졌는걸.”


“네가 망가뜨린 게 아니잖아.”


“네가 망가뜨렸잖아.”


주강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새까만 눈동자에 온기가 없다. 어딘가 이상하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고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퍼진다. 익숙한 불안과 불길함. 여주는 지금 드는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변명한다.


“내가 망가뜨린 게 아니야!”


툭, 머리핀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올렸던 머리가 흐트러진다. 반듯하게 깎인 나비 모양이 두 동강이 난 채 굴러간다.


“네가 망가뜨렸어.”


주강이 저벅저벅 그녀 앞으로 다가온다. 오늘따라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이 무섭게 느껴진다. 여주는 뒷걸음질 치며 물러선다.


“아, 아니야. 나는!”


그냥 떨어진 거라고, 머리핀을 받아서 기뻤다고 말하려는데 목이 꽉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이 목을 조르는 것처럼.


“아버지 회사도, 우리 가족도 네가 망가뜨렸어.”


“아니야!”


소리치자 주강은 사라지고 없다. 허둥대며 움직이자 발밑에서 파사삭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두 동강 난 머리핀이 산산조각이 났다.


“주강아, 어디 있어? 나 무서워. 이러지 마.”


등줄기가 한기로 쭈뼛 섰다.


끼익 끼익.

소름 끼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책상에 칼로 글자가 새겨진다.

살인자.

끼이익. 끼이이익.


날카로운 조각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가 이어진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아니야!”


칠판에 무수히 새겨지는 글자들. 등 뒤에서 들리는 수군거림. 몸을 돌리자 수많은 눈이 그녀에게 쏟아진다.


“살인자.”


“네 가족이 다 망가뜨렸어.”


“네 아빠가 사람을 죽였어.”


무수히 많은 눈이 그녀를 향한다.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얼굴들이 다가왔다. 뒷걸음질 치다가 칠판이 벽에 닿았다.


“아니야, 아니야. 우리 아빠는 살인자가 아니야!”


“정말?”


구분할 수 없는 얼굴들 사이에서 주강이 튀어나온다. 비릿한 미소를 건 채 되묻는다.


“살인자 맞잖아.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넌 살인자의 딸이라고.”


“아니야!”


비명을 지르며 여주가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새벽 4시. 아직 바깥은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했다. 악몽에서 깼지만 몸이 계속 떨렸다. 지난 기억이 어제처럼 되살아났다. 여주는 몸을 움츠리며 어깨를 감쌌다. 눈썹에 흉터가 있는 남자, 이든. 다 그 남자 때문이었다.     


“안색이 나빠 보여요. 어디 아파요?”


“아뇨. 괜찮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낯빛이 흐린 여주를 향해 이든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흔한 질문에도 그가 했다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든은 그녀의 기억 속 차주강보다 골격도 더 크고 인상도 다르지만 순간순간 느껴지는 눈빛이나 미소가 흡사했다.


“바닐라라떼 좋아하죠?”


회사에서 그녀가 마시는 건 탕비실의 믹스커피가 전부였다. 몇천 원 하는 커피값도 아까워 사람들과 커피를 마신 적도 없다. 그래서 커피 취향도 드러낸 적이 없다.


‘좋아해요?’가 아닌 ‘좋아하죠?’라는 물음은 마치 그가 차주강이라고, 난 너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그가 건네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여주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의미를 부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같이 점심 먹어요.”


“가는 길 같은데 데려다줄게요.”


부여한 의미가 커질수록 지극히 일상적인 인사와 대화에도 여주는 그를 모른척하거나 피했다.


“여주 씨가 원래 말이 없어요.”


“무슨 재미로 사나 몰라.”


직원들에겐 여주의 행동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겉돌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주는 그곳에서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불편해요? 아니면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요?”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무시해버리면 좋을 텐데. 이든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친절한 말투와 상냥한 태도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 부드러움에 차주강이 아닐지도 모른단 생각에 의심을 거두려다가도 때때로 빤히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이 차주강을 떠올리게 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자신에게 상처 준 차주강의 눈빛이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최선의 대답이었다. 당신이 차주강일지도 몰라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친절할수록, 상냥한 미소를 띨수록 마음의 불안은 더 커지니까. 차주강이든 아니든 이대로 내버려 달라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구여주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그는 그녀가 피하는데도 여전히 아침 인사를 건넸고 커피를 사거나 초콜릿을 건네곤 했다.


“여주 씨, 혹시 이든 팀장님이랑 아는 사이야?”


“아니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2년 가까이 본 우리보다 여주 씨를 더 잘 아는 거 같아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말. 여주를 향한 그의 친절과 관심이 누군가에겐 거슬리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든과 친해지고 싶어 했지만 그 안에 여주가 끼는 건 불편해했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변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존재에서 거슬리는 존재로.

이전 04화 [소설] 04화 간절한 메시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