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게 잠겨 있던 의식이 안개가 걷히며 깨어났다. 감은 눈을 뜨자 파란 하늘이 시야에 가득 찼다.
깜박,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사이 정신은 점점 또렷해져 다른 감각을 전해왔다. 모든 것이 낯선 감각. 등이 닿은 곳은 카페의 딱딱한 바닥이 아닌 흙모래가 굴러다니는 땅바닥이었고 피부에 와 닿는 공기도 달랐다. 사방이 뚫린 곳, 빛이 무한대로 쏟아지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깜깜했던 밤은 환한 낮이었고 겨울의 찬바람은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몸에 닿았다. 몸을 일으킨 여주는 눈에 들어오는 대로 주변을 살폈다. 바람에 출렁거리며 춤을 추는 꽃나무, 색이 벗겨진 철봉, 다닥다닥 붙은 창문이 보이는 건물, 볼수록 눈에 익은 공간들에 그녀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여긴…….”
회화고. 이곳은 그녀가 좋아했던 봄이 예쁜 학교였다.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도망치듯 떠난 학교.
믿을 수 없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눈앞에 광경은 더욱 또렷해졌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걸까. 다락방에서 정신을 잃었는데, 혹시 납치라도 당한 걸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삐거덕거렸다. 누가 사람을 납치해서 운동장 한가운데에 데려다 두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 결론은 하나였다.
‘꿈이야.’
학교가 꿈에 나온 건 빈번히 일어난 일이었다. 대부분 악몽의 배경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주 꿨던 악몽보다 오랜 기억 속 학교였다. 잔잔한 풍경화 같은 학교.
복도는 고요했다. 과거라면 끔찍했는데, 막상 복도에 들어서니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신기하게도 지금 떠오르는 건 잊고 싶은 과거가 아닌 추억이었다. 언제나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이 있었다. 전학 간 후 연락조차 하지 못했지만 항상 그리워했던 친구들. 아무 말 없이 전학 갔기에 연락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적지 없이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꿈이라면 이 복도가 끝없이 이어지지 않을까 하고, 마치 미로를 헤매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누구지?’
얼핏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디선가 본 모습에 여주의 눈이 커졌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는 사이 그녀의 눈에 낯익은 공간이 들어왔다.
“여긴 상담실이잖아.”
조용한 복도에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추억이 깃든 곳이 나타나자 되살아난 그리움에 가슴 한구석이 일렁였다. 상담실은 어린 그녀가 유일하게 찾는 곳이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빼꼼, 고개를 들어 문에 달린 작은 창으로 상담실을 들여다봤다. 창으로 보이는 아담한 상담실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에 문고리를 몇 번 매만졌다. 문은 잠겨 있었다. 열리지 않을 문고리를 매만지다 손을 거뒀다.
꿈이라면 한 번쯤 나와도 좋을 텐데. 아쉬움을 뒤로하며 발을 떼다 얼핏 보이는 머그잔에 다시 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선생님의 머그잔이 분명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다갈색 머그잔을 들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까 그 사람이?’
왜 이제 알았을까. 희미하게 커피 향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선생님이 있는 곳엔 언제나 커피 향이 나니까.
꿈이 깰까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뛰었다. 선생님을 찾자. 비록 곧 깰 꿈일지라도.
“으앗!”
서두른 걸음 탓에 묵직한 무언가가 정면으로 얼굴에 부딪혔다.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끈이 달린 딱딱한 물건이 손에 잡혔지만 힘없이 툭 끊어졌다.
“흐앗!”
쿵, 소리를 내며 여주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말도 안 돼!’
엉거주춤하게 몸을 일으키던 그녀가 몸이 굳은 듯 멈췄다.
“아파.”
왜 아픈 거지?
입에서 나오는 신음조차도 끊길 만큼 놀란 그녀는 믿어지지 않는 감각에 혼란스러웠다. 꿈이라면 아픔이 느껴질 리 없을 텐데. 아무리 악몽을 꿔도 아픔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오히려 공포스러운 순간은 꿈에서 깨곤 했다. 그런데 지금 느껴지는 건 생생한 통증이었다.
몽유병이 있었나.
그녀는 다시 주변을 살피려 했다. 이곳이 정말 그녀가 다닌 학교가 맞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엄마야!”
혼란스러워하며 고개를 드는데 그녀 앞에 남학생이 엎어져 있었다.
“어, 어떡해!”
그녀와 부딪힌 남학생이었다. 뛰듯이 튀어나온 여주는 앞으로 걷고 있던 남학생이 메고 있던 가방과 부딪혔다. 얼떨결에 남학생 가방까지 잡아당겼으니, 그 힘에 딸려 온 그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봉변을 당한 꼴이었다. 여주는 당황해 어찌할 줄 몰라 엉거주춤 남학생에게 다가갔다.
“저기, 괜찮아요?”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상황에서 그녀는 난감해하며 말을 걸었다. 남학생은 등을 보인 채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 손 잡아요.”
휙, 남학생은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내민 손이 민망해진 여주는 한 번 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진짜 미안해요.”
몸을 일으킨 남학생은 말랐지만 키가 커 여주가 올려다봐야 했다. 그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바닥에 나뒹구는 책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친 데 없어요?”
난감해하며 여주가 서성거리자 남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반창고가 붙여진 코, 터진 입술. 생김새보다 상처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얼굴. 그녀는 눈을 크게 깜박이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익숙하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순식간에 둘러쌌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남학생의 얼굴을 살핀다. 어딘가 공허한 눈빛, 부스스한 머리, 움직이다 입가에 상처가 아픈지 찡그리는 눈가와 입술. 그러다 그녀를 보곤 다시 다물어지는 곧은 입매. 언제나 상처투성이였던 모습.
그녀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치는 이름 석 자가 있었다. 설마 하며 여주는 곧바로 남학생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차주강.
“차, 차주강?”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놀란 그녀는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믿기지 않았다. 정작 그리워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떠올리기 싫은 녀석이 눈앞에 있었다.
“누구세요?”
남학생의 목소리에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돌아서 뛰었다.
그래, 이건 악몽이다. 악몽임이 틀림없다.
무작정 뛰었다. 따스했던 햇볕이 강렬한 빛이 되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정신없이 뛰니 어느새 그녀가 깨어났던 운동장에 도착해 있었다. 나뭇가지에 꽃잎들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현기증을 일으켰다.
풀썩, 힘없이 몸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가라앉듯이 쓰러졌다. 눈이 부셨다. 찌푸린 눈살로 쳐다본 하늘에선 꽃잎이 눈처럼 떨어졌다. 꽃잎이 점점 커다랗게 보일 때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곧 눈이 감기며 힘없이 손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여주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정신이 듭니까?”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제일 먼저 보인 건 목에 독특한 문양의 타투를 한 남자였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여행이요?”
그제야 지금 어디에 있는지 떠올렸다. 무슨 꿈을 꿨는지도. 여주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담요가 툭 떨어졌다.
“당신이 협박 편지 보낸 사람이에요?”
“협박 편지를 보낸 기억은 없습니다만.”
여주는 고개를 휙휙 돌리며 편지를 찾았다. 다락방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 편지 말이에요. 카페 명함이랑!”
“이건 협박 편지가 아니죠. 엄연히 주인을 찾으려고 한 행동입니다.”
남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이봐요.”
“도욱입니다. 도욱.”
도욱. 큰 키에 깡마른 몸. 곱슬머리에 피어싱. 온통 블랙이 셔츠와 바지. 한껏 가벼워 보이는 어린 얼굴의 남자. 여주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도욱은 몇 통의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역시 당신이 보낸 편지군요.”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난 전해주기만 한 거예요. 배달부에 가깝죠.”
“무슨 말이에요?”
“누가 보냈는지는 나도 몰라요.”
어이없는 대답에 여주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럼 이걸 왜 나한테 준 거예요? 당신 대체 누구길래!”
“이 편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몰라요. 단지 난 유언을 지키기 위해 당신한테 이 편지를 전했을 뿐이에요.”
“유언? 누구의 유언이죠?”
“이 카페 사장님.”
장난기는 사라지고 그의 눈빛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이 오래되고 낡은 카페의 사장이 남긴 유언이라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장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사장님 성함이 뭐죠?”
“아마 모를 거예요. 한구운.”
그의 말처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사장님도 전달 해주라는 사람이지, 편지를 쓴 사람은 아니니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아마 이 편지는 오래전 누군가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일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왜 보냈는지는 몰라요. 알 수 있는 건 당신뿐이에요.”
여주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그쪽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나를 어떻게 찾았어요?”
“그건 내 능력이 좋아서.”
도욱은 다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빙긋 웃었다.
“하!”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 대답이 얼마나 수상해 보이는지 저 남자는 모르는 걸까.
“그럼 왜 몰래 놓고 갔죠? 날 만나서 줘도 되잖아요.”
“그건…”
도욱이 뜸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