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님 유언이에요. 당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이 편지를 전하지 말라고 했어요. 편지를 받는 순간부터 당신 삶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요.”
“거짓말.”
어쭙잖은 말을 들어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도욱 앞으로 가까이 다가간 여주는 그의 얼굴에 대고 짓씹듯 내뱉었다.
“개수작 부리지 마.”
도욱의 눈썹이 휘어지며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당황하기보다 흥미에 가까운 눈을 하고선 잠자코 여주의 다음 말을 들었다.
“당신 짓인 거 다 알아. 나한테 편지 보낸 것까지 모자라 회사 게시판에 글 올려서 협박했잖아.”
도욱의 한쪽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내 소문을 퍼뜨려서 뭐 하자는 건데? 누가 사주한 거야?”
“편지는 내가 한 짓이 맞지만 회사 게시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어쭙잖은 거짓말 하지 마.”
이번에는 도욱이 여주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가까이 다가온 그가 손을 뻗자 움찔한 여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꽤 둔하군요.”
톡, 그의 손가락이 머리칼을 가볍게 스쳐 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도욱이 손가락 끝으로 잡은 것을 내밀었다.
“이거 떼주려고.”
“……꽃잎?”
꽃잎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리저리 몸을 살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 위에 꽃잎 몇 개와 흙투성이가 된 옷, 그리고 절대로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낡은 열쇠고리. 그 녀석의 가방에서 떨어진 열쇠고리였다. 여주는 또 한 번 비명을 질렀다.
“이것도 꿈이야? 나 정말 몽유병이라도 있는 거야?”
“진정해요, 누나.”
“진짜 나 납치라도 한 거야?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요. 이건 꿈도 아니고, 몽유병도 아니니까.”
도욱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움켜잡은 도욱의 손에 여주는 그의 눈을 마주 봐야만 했다. 장난기 가득한 눈은 그새 사라졌다. 위협적인 태도도 아니었다. 그는 여주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봐요.”
그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다락방 천장에 난 창문이 보였다. 여주는 지난밤 기억을 되감았다. 이곳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렸을 때, 아무도 없어 주저앉아 기다렸을 때, 텅 빈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발견하고 무작정 카페 안으로 들어갔던 그 순간을.
“맞아. 저기서 빛이 쏟아져서 정신을 잃었어.”
홀리듯 빛을 따라간 곳은 이 작은 다락방이었다.
“이상한 소리가 났어.”
웅웅 거리는 진동음, 그리고 시야를 가득 메운 정체불명의 글자들.
“글자!”
나를 구해줘. 나를 구해줘. 나를 구해줘! 나를, 나를……!
“글자가 보였어요! 글자가 나한테 쏟아졌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희미해진 기억이 또렷해지자 흐릿했던 잔상도 선명해졌다.
“메시지예요. 누나를 부르는 메시지.”
“메시지?”
“이 편지가 당신을 부르는 메시지. 이 메시지를 통해 과거로 가는 통로가 열렸어요.”
“과거로 가는 통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잘 기억해 봐요. 꿈이라기엔 선명하고 모든 감각이 살아있었을 테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어젯밤의 생생한 감각은 꿈이 아니었다.
“이 다락방은 메시지를 읽고 과거는 가는 문을 열어요.”
“말도 안 돼.”
믿기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머리는 믿기지 않는데 모든 감각이 현실이라 외쳤다. 이 겨울 날씨에 봤던 꽃나무 잎은 아직도 그녀 머리 위에 있었고 가방에서 떨어진 열쇠고리는 손바닥 안에 있었다.
“음, 쉽게 생각해요.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나한테는 기적이 아니라 악몽이었어요.”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이마를 짚었다.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던 그녀의 눈에 도욱이 손에 쥔 편지가 들어왔다.
“설마 이 편지가?”
“맞아요. 이 편지가 과거로 가는 통로를 열었어요.”
도욱은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다락방의 비밀을 밝혔다. 메시지를 읽는 카페 흐노니의 다락방. 간절한 마음이 담긴 기록물이라면 달이 뜬 밤의 다락방은 그 메시지를 읽는다.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에 귀 기울이며 과거로 가는 통로를 연다.
“나를 구해줘라는 게 메시지라는 건가요?”
“맞아요. 그 메시지 때문에 누나를 찾은 거고요.”
“메시지 뜻이 뭐죠? 누가 나한테 이런 걸 보낸 거예요?”
그녀는 답답한 듯 그의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건 나도 몰라요. 과거의 누군가가 누나를 간절히 찾는다는 것만 알죠. 왜 사장님이 이 편지들을 갖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누나의 과거와 연관된 건 분명해요.”
“내 과거.”
자꾸만 그녀의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편지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럼 회사 게시판은 정말 그쪽이 아니라는 거예요?”
“무슨 글인지 모르지만 내가 편지를 전해주려는 이유는 바로 이 기적을 선사하기 위해서였어요.”
여주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 카페의 다락방이 현실 같지 않은 공간이라면 회사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그녀가 여태 살아온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런 비현실을 선사한다는 사람이 그녀의 꼬리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은 아니란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다시 과거로 갈 수 있어요? 지금 당장?”
의심을 품은 그녀의 물음에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는 한 번 열리면 이 편지를 지닌 사람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요.”
“편지만 있으면 되나요?”
“보름달이 뜬 밤. 메시지가 담긴 기록물. 그 기록물의 주인. 이 세 가지가 있어야 과거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려요. 공교롭게도 보름달이 뜬 밤 누나가 이곳을 찾은 거죠.”
보름달이 뜬 날 편지의 주인이 회화까지 내려와 카페 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일부러 유인했구나. 여주는 도욱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의문스러운 부분을 추궁했다.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먼저 말했다면 믿었겠어요? 미친놈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뭐, 협박범 취급은 당했지만.”
도욱은 어깨를 으쓱하며 딴청을 부렸다. 어느새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며 여주를 이끌었다. 그는 따뜻한 차를 먼저 내와 건넸다. 여주가 차를 홀짝홀짝 마시자 2층으로 올라간 도욱은 편지 꾸러미를 가지고 내려왔다.
그중 편지 두 통을 도욱이 내밀었다. 여주는 아직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편지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다정하다는 네가 미워.
구여주 네가 미워. 널 원망해.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다시 돌아갈 거야, 처음으로.
두 번째 편지도 짧았다. 글씨는 여전히 비뚤어졌고 종이는 시간이 흐른 만큼 바랬다.
“협박 편지인 줄 알았는데.”
“제 탓이에요, 누나. 전해주는 방법이 나빴어요.”
언제 봤다고 누나, 누나 거리는지. 친화력 하나는 끝내주는 그를 보며 여주는 혀를 내둘렀다.
“대체 누가 보낸 거지.”
여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 번째 편지로 손을 뻗었다.
“혹시 편지를 보낸 사람, 과거에서 만난 사람 아닌가?”
은근슬쩍 말을 놓는 그의 말에 여주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과거에서 누굴 만났다고 했잖아. 그 열쇠고리 주인.”
“설마 그 자식이 쓴 편지는 아니겠지?”
“그 자식이 누군데?”
여주는 입술을 씹듯 깨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하필, 그 녀석과 마주쳤을까.
차주강. 그 녀석은 그녀 인생에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개자식.”
꿈에서도 보기 싫은 녀석이건만. 그 녀석이 자신에게 편지를 썼다면 그건 저주의 편지가 분명했다. 여주는 다른 단서라도 찾기 위해 편지를 샅샅이 살폈다.
“잠깐. 이 편지는 달라.”
“왜?”
여태 본 두 통의 편지와는 다른 정갈한 글씨체의 세 번째 편지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선생님 필체야.”
“선생님?”
엉망이었던 글씨체가 아닌 독특하지만 정갈한 필체가 눈에 익었다. 몇 번이나 읽고 있었던 편지이기에 모를 수 없는 필체. 유일하게 그녀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어준 편지. 십 년이 훌쩍 지났지만 선생님의 필체는 또렷이 떠올랐다.
여주야. 나는 항상 내 잘못을 생각했어. 후회하고, 또 후회했단다.
다시 되돌릴 수 없단 걸 알아. 그래서 미안하다.
난 정말 너에게 못 할 짓을 했어.
선생 자격도 없구나.
그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모든 순간이 후회로 남는다.
역시 선생님의 편지가 맞았다. 여주에게 항상 미안해하던 그. 전학 가는 그녀를 막지 못한 죄책감. 선생님으로서 느꼈을 후회가 짧은 편지에서도 드러났다.
“이것만 보고 확신해?”
“응. 선생님밖에 없어.”
“드디어 메시지를 보낸 사람을 찾았네.”
꺼림칙했던 편지는 세 번째 편지를 읽은 순간 그리움의 흔적으로 변했다.
“혹시 누나가 좋아한 선생님? 분위기가 아련하게 변했는걸.”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거든.”
전학 간 후에도 선생님과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를 걱정하는 선생님의 제안이었다.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고 별거 없는 일상을 써 보냈다. 그때 그 편지는 여주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선생님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
“혹시 이거 누나가 보낸 편지야?”
그가 나머지 편지 뭉치를 건넸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이자 답장받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그 편지가 이 카페에 왜 있을까.
“선생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아마도.”
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를 과거로 부른 거니 보통 편지는 아니란 뜻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두 통의 편지. 선생님이 보낸 게 분명한 한 통의 편지. 그리고 그녀가 선생님께 보낸 편지들.
“선생님이 걱정돼?”
“불길해. 다른 편지는 글씨도 엉망이고.”
“과거로 갈 거야? 선생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기 위해?”
“모르겠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첫 기억이 달갑지 않으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동시에 그리움과 걱정이 생겨버렸다. 스스로 미련 따윈 없다고 믿었는데. 12년 전 기억은 아픔뿐이라 자물쇠를 달았던 과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해지지 않은 편지를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과거로 가겠지만 그녀는 달갑지 않은 녀석을 만나고 온 길이었다.
그 녀석은 언제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람 잘 찾지?”
그녀에겐 과거에 대한 그리움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선생님을 찾고 싶었다. 이 편지들을 선생님이 보낸 게 맞다면 아픈 과거보단 지금 만나고 싶었다.
“선생님 찾아줘. 12년 전 회화고 수학 선생님, 서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