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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파 Oct 11. 2024

[소설] 06화 그의 시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봄에 맞춰 새로운 가구 브랜드를 선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든이 이끄는 첫 회의. 그는 유려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회의를 진행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봄에 맞춰 브랜드 출시를 준비하려면 한시가 바빴다.


“브랜드 런칭에 맞춰 제 전시회가 열립니다. 그 전시회에서 새로운 브랜드 가구를 선보이려고 합니다.”


“팀장님 전시회에 제가 만든 가구가 전시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단지 내 가구 전시를 할 거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파격적인 기회로 회의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팔리는 상품만 만드는 게 아닌 한 작품으로서 전시회에 선보일 기회였다. 특히 이든과 함께 나란히 이름이 걸린다는 자체가 메리트였다.


“회의를 통해 브랜드 콘셉트가 정해지면 디자인을 받을 겁니다. 그 디자인은 공정한 심사를 통해 뽑을 계획입니다.”


팀원들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이든의 시선은 마주하지 못하는 여주만 제외하고.


“각자 생각해 온 콘셉트를 말해보죠.”


모두 의욕에 차 여러 아이디어를 냈다. 이든은 한 명, 한 명의 아이디어를 신중하게 들으며 자기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든은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이 있었다. 가구 디자이너로서 회사 경력이 없다고 은근히 무시하던 몇몇 직원들도 놀라는 눈치를 보일 정도였다. 어떤 의견이든 귀담아들으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직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구여주 씨.”


회의가 막바지로 가는 중 이든의 시선이 여주에게 닿았다.


“어디 아픕니까?”


“괘, 괜찮습니다.”


“회의에 영 집중을 못 하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항상 다정다감하게 묻던 그가 아니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은 다시 차주강을 떠올리게 했다.


“이번엔 구여주 씨가 말해볼까요?”


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주를 향했다. 한꺼번에 많은 눈이 그녀에게 몰리자 속이 울렁거렸다.


“죄, 죄송합니다.”


그의 빤한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 여태 다정했던 그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회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다음 회의 때까지 오늘 나온 사안을 구체화하여 콘셉트를 잡도록 하겠습니다. 이만하죠.”


그 말을 끝으로 회의가 끝났다. 이든이 먼저 회의실을 나가자 사람들은 하나둘 기지개를 켜거나 굳은 어깨를 움직이며 한마디씩 첫 회의에 감상을 늘어놨다.


“팀장님이랑 전시회라니. 대박!”


“다음 회의 준비 단단히 해야겠어요.”


“멋있는데 좀 무섭다.”


한마디씩들 하며 다들 흘끔 여주를 쳐다봤다. 말은 안 하지만 회의 분위기를 망친 탓을 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주 씨 괜찮아?”


입사한 지 1년이 안 된 막내 직원이 물었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 팀장님이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김 대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마디를 툭 하곤 지나갔다. 여주는 사람들이 떠난 회의실을 정리했다.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주를 향한 낮은 목소리, 싸늘했던 시선만이 떠올랐다. 하루 만에 바뀐 그의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테이블 위 늘어진 자료와 컵을 정리하다가 주저앉았다.


“구여주 씨는 점심 안 먹습니까?”


회의실 정리를 하고 나온 여주를 향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든을 필두로 직원들이 함께 점심 먹으러 나가는 길. 혼자 남은 여주를 향해 그가 물었다. 방금까지 질책하던 싸늘함은 사라지고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여주 씨는 혼자 먹어요. 도시락 싸 오거든요.”


김 대리의 말에 이든은 별말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다른 팀원들 역시 점심 잘 먹으라는 인사 한마디 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후우.”


별말 아닌데 이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꾸만 놀라고 긴장한다. 그 후에 찾아오는 가슴을 억누르는 답답함은 숨이 막히게 했다. 다정하게 굴다가 싸늘해지는 모습이 마치 12년 과거를, 과거의 불안을 떠올리게 한다.


‘다신 속지 않아.’


여주는 최대한 이든을 피해 다녔다. 그의 다정함에 속지 않기 위해, 그의 싸늘함에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마주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게 그녀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하던 대로. 그렇게만 하면 불안도 감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구여주 씨는 회의 준비를 안 하는 겁니까, 할 생각이 없는 겁니까.”


회의 시작부터 날 선 목소리가 여주를 향해 날아들었다. 구체적인 콘셉트 회의에서 빈손으로 온 여주를 향한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커피 준비 말고 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 구여주 씨가 계약직이라 제 보조를 주로 해왔습니다. 제가 잘 가르치면서 하겠습니다.”


최범석 과장의 말을 자른 이든이 여주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계약직은 디자이너 아닙니까? 구여주 씨 디자이너로 채용된 거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살얼음판이 된 회의에서 모두 입을 다물고 이든의 눈치를 봤다.


“커피 사 올 시간에 회의 준비 제대로 하세요.”


팀원들이 회의 전 여주에게 미리 주문한 커피였다. 여주는 항상 회의 시작 전 회사 밖에 있는 카페에서 각자 취향에 맞는 커피를 사 왔다.


“내 커피는 내가 알아서 합니다.”


자유롭고 열정적인 지난번 회의와 달리 모두 눈치를 보며 회의를 했다. 1시간이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회의가 끝나고 이든이 나가자 모두 지친 기색을 드러냈다.


“여주 씨 제대로 찍혔네.”


“미운털 박힌 거 아니야?”


“김 대리가 커피 사 오라고 닦달해서 그래.”


엉망이 된 분위기에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위로나 위안은 아니었다. 앞으로 커피 심부름을 시킬 때도 눈치가 보일 거라는 성가심이 깃든 투덜거림 정도.


여주는 그가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를 든 채 탕비실로 갔다. 싱크대에 커피를 쏟아버리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차주강이 맞아.’


그게 아니라면 사사건건 걸고 넘어가진 않을 테니. 그건 악의였다. 거슬리거나 싫어하는 사람에게 하는 행동. 싫으면 차라리 무시해 버리지.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며 시선이 쏠리게 한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


차주강은 구여주에게 악몽이고 상처였다. 그러니 그를 보고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도, 그를 지독히 싫어하는 것도 모두 그녀의 몫이어야 했다. 차주강은 가해자이고 구여주는 피해자니까.     





     


익숙한 공간이 낯선 공간이 되어 있을 때는 같은 일상도 다르게 느껴진다. 12년 전, 그날 학교가 그랬다. 평소와 다른 조용한 교실. 소리 없는 시선. 교실을 벗어나도 멈추지 않는 수군거림. 따라붙는 눈들.


‘여주 아빠가 사람을 죽였대.’


‘횡령하다가 걸려서 죽였다면서?’


회화는 소도시여서 큰 사건이나 사고가 드문 조용한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건설 현장에서 벌어진 사망사고는 지역뉴스와 지역신문을 도배했다. 무심코 뉴스를 흘려들은 여주는 곧 사건의 주인공이 아빠란 걸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다정한 아빠가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는데, 요 며칠 이상했던 부모님의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 늦은 밤 술에 취해 귀가하던 아빠, 잦은 부모님의 싸움, 엄마의 점점 파리해지던 얼굴. 온기가 가득했던 집안이 삭막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정말 사람을 죽였어?’


딸의 물음에 엄마는 답하지 못했다. 어느 날부터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여주가 아빠를 본 건 뉴스였다.


소문으로만 나돌던 건 사실이 되었다. 모두 그녀의 가족에게 손가락질했다. 그녀를 믿어주는 건 유일하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었다. 특히 단짝 친구인 하경은 여주 대신 화를 내며 싸웠다. 그녀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여주 편을 끝까지 들었다.


‘여주야, 걱정 마. 수사하면 밝혀질 거야.’


그렇게 믿었다. 누명만 벗겨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직원들을 종처럼 부려 먹었대.’


‘여주가 아빠가 사줬다면서 자랑한 머리핀 비싼 거 아니었어?’


‘설마 사람 죽인 돈으로? 소름 끼쳐.’


유언비어 같은 말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진실을 기다리지 않았다. 18살 소녀가 해명할 수조차 없는 말들이 사실이 되었다.


수많은 말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래도 버티고 버텼다. 언젠가 사람들이 제 말을 믿어줄 거라며 버텼지만, 그 믿음은 너무나 쉽게 무너질 허술한 마음이었다.


‘여우 같은 X’


‘살인자’


‘너부터 죽어!’


점점 여주를 괴롭히는 아이들의 행동이 심해지던 날. 유난히 그 아침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어? 누구야!”


아침 인사를 하려던 하경이 그녀의 책상을 보고 화를 냈다. 반 아이들은 모두 모른다며 고개를 흔들거나 코웃음치며 외면했다.


“여주야, 괜찮아?”


“나 화장실 갔다 올게.”


숨 막히는 교실의 분위기에 여주는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쟤네 엄마가 유부남을 꼬셨대.”


“정말?”


“한둘이 아닌가 봐. 그러니까 남편 부하랑도 바람을 피우지. 그래서 죽였대.”


교실을 벗어나도 수군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보험 영업이 아니라 다른 영업을 했나 봐.”


“우웩!”


두 남학생이 여주의 이야기를 더러운 농담처럼 주고받았다. 여주는 갈 곳이 없어 화장실 칸에 들어가 숨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엄마가, 엄마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했다. 엄마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치정 살인사건. 단어 하나하나가 끔찍해서 여주의 믿음조차 속절없이 흔들렸다.


“너 그거 들었어?”


“구여주 엄마 얘기?”


화장실에 들어오는 여학생들의 말소리에 여주는 숨을 죽였다.


“아니. 구여주 얘기. 걔가 커피쌤한테 꼬리 친대.”


“에이, 설마?”


“나도 들었어. 밤에 선생님 집도 찾아갔대.”


“아침마다 교실에 단둘이 있는 거 본 애들도 있어.”


걷잡을 수 없는 소문은 여주에게도 뿌리를 뻗었다.


“딱 하는 짓이 자기 엄마네.”


“혼자 얌전한 척은 다 하더니.”


“야, 너희들! 이상한 소문 퍼뜨릴래?”


누군가 소리치자 아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여주야, 여기 있어?”


아이들이 나가자 하경이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하, 하경아.”


겨우 문을 열고 나가자 하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나 어떡해. 나…”


주르륵, 참았던 눈물이 친구를 보자 흘러내렸다.


“괜찮아, 저런 말을 누가 믿는다고 그래.”


하경의 위로에 여주는 그녀의 품에 안겨 울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소문 따윈 금방 사라질 거야. 하지만 소문은 점점 몸집을 키워갔다.


“어? 구여주 너 뒤에 뭐 묻었어.”


복도를 지나가던 여주를 향해 두 남학생이 치마 뒤쪽을 가리켰다. 여주는 뒤쪽을 살피며 치마를 손으로 털었다.


“아니, 그쪽 말고.”


엉덩이를 쳐다보는 시선에 여주는 민망해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 잘못 봤다. 꼬리네, 꼬리.”


“야! 넌 꼬리를 착각하면 어떡하냐. 저렇게 많이 달렸는데!”


두 남학생의 낄낄거림에 여주는 수치심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딜 가!”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여주를 한 남학생이 붙들었다.


“너 저번에 나 쌩깠잖아. 선생이 취향이었냐?”


“함부로 말하지 마.”


여주는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너 선생한테 혼자만 공부 봐달라고 했다며? 집에도 찾아가고.”


“애들 다 알아. 너 아주 작정했다며!”


“누가 그런 말 했어?”


근거 없는 소문에 ‘누구’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알면서도 울분에 찬 여주는 따져 물었다.


“그놈이 봤다던데.”


“그놈이 누군데!”


“아씨, 귀 따가워.”


남학생이 인상을 찡그리며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 일진 놈. 차주강.”


“뭐라고 했어? 지금?”


“차주강이 그랬다고. 따지려면 걔한테 따져.”


나오면 안 되는 이름이었다.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상대니까 그 이름만은 이 일과 상관없어야 했다.


“야, 차주강한테 다 들었거든. 너 차주강 꼬셔서 아빠 일 무마하려고 하다가 여기저기 꼬리치는 거 들었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게 차주강이랑 무슨 상관이야?” 


“모르는 척은. 차주강 아빠가 너희 아빠 회사 사장이잖아.”


말수는 적지만 이야기는 잘 들어주던 녀석이, 매일 멍과 반창고를 달고 살지만 여주에게만은 다정했던 녀석이었다. 친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마음을 털어놓은 상대였다. 그런 상대에게 처음으로 배신을 당했다.


그 후 회화를 떠났다. 그 평온하고 조용하던 회화는 더는 여주의 가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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