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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장인 Jul 06. 2024

군대에서 나를 브랜딩 해보았다

연기가 아니라 생존전략이다

 이번엔 실제 일상에서 나를 브랜딩 한 사례를 보여주려고 한다. 비즈니스적으로나 브랜딩인거지 그냥 자아성찰의 과정에 가깝게 보일 수도 있다.


 중국에 있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 만에 군입대를 했다. 사회생활이라고 해봤자 중국에서 조-금 해본 게 전부였다. 나이 28살 늦은 나이에 군입대를 하자니, 내 딴에 꽤 걱정을 했지만, 훈련소에서도 같은 나이 또래의 훈련병들을 여러 명 보니 용기가 생기기도 했다. 


 그것도 찰나였다.

 훈련소를 떠나 자대에 들어갔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조교한테 존댓말 할 때만 해도 잘 몰랐는데, 진정한 계급 사회에 접어들면서 선임병뿐 아니라 동기들과 편하게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은 내게 매우 힘들었다.


 그렇게 자대에 들어간 지 2주 가량 지났을 때였다. 신병 12명 중 딱 1명만 5월 말에 투입할 야외 훈련 지원자를 받는 일이 생겼다. 그때 잠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었지만 '이 기회를 잡지 않으면 나이도 많은 영감탱이가 열심히도 하지 않고 불평불만만 많아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 냉큼 손을 들었다. 다른 동기들의 의지 부족으로 내가 가게 됐다-기보다는 그저 누구보다 빨리 이 사실을 알았고, 그 기회를 낚아채버린 것이다. 나와 동기 한 명이 속해있는 소대의 담당관님이 다이렉트로 먼저 훈련 소식을 듣고 와서는 우리 둘에게 먼저 권유했기에, 경쟁률은 사실상 2 대 1이었다. 그래서 신병 모두에게 전달해야 할 사항에서 지원자가 불쑥 나와버리는 바람에 내가 가는 것으로 확정이 나버렸다. 변화하기 위한 시작점은 빠를수록 좋았고 그것이 바로 그때였다.


 <포지셔닝, p.257> 에서는 배에 비유한 말이 있었다.

 '대기업이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항공모함이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다. 실제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1마일이나 더 나아간 다음이다. 만일 그 방향 전환이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전보다 어 오랜 시간, 더 먼 거리를 나아가야 한다.'


 이는 개인에게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예시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방향에 치우쳐 변화를 꿰하지 않는다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질 것이다. 군생활의 첫 단추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끼워야 했다. 1년 8개월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긴 만큼 처음부터 함부로 경거망동 했다간 군생활 전체가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 스스로를 브랜딩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려 노력했다.

 내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을 철저히 뜯어고칠 것을 스스로 약속했다. 브랜딩을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겠다기보다는 바꿀 부분은 바꾸되, 나의 좋은 부분을 더 강조하는 방향을 세우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첫째, 나의 보수적인 부분을 지웠다. 나이를 매우 중하게 생각하고, 성적인 농담을 전혀 하지 않고, 하나하나 까칠하게 구는 부분들이었다. 즉, 계급 사회에 철저히 적응하고, 동료들의 언행을 최대한 포용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뭐 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것이 내가 살아남고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이다. 온전한 나를 숨겼다. 앞서 말한 것 때문에 의아해 할 수 있지만, 보수적인 것 치고는 본래 나는 장난기가 많고, 다소 무례한 사람이기도 했다. 입이 험하거나 그렇진 않지만, 그 외 부분에서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매우 얄밉고 짜증나보이는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그저 자연스럽게 말하고 행동했지만 이상하게 친구들이 싫어하는 것들이 꽤 있었다.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부분을 감추기 위해서 나름의 경험을 하고 책을 읽으며 새로운 모습을 덧입혀 '싫지 않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깨달은 후로는 상처 주는 걸 싫어한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모든 모습을 100프로 감출 순 없었지만 다행히도 군생활에 큰 악영향을 끼친 것 같진 않았다. 늘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때로는 상황에 맞춰 적절히 나 자신을 숨기고 바꿀 필요가 있었다.

 셋째, 이왕이면 바짝 엎드렸다. 상하 관계에 철저히 한다는 것이다. 선임들이 나와 나이차가 얼마나 나든 최대한 순응의 자세를 보였다. (8살 차이도 있었다) 오히려 그들을 존중했다. 나이만 더 많지 군경험은 훨씬 많은 선배님들이 아닌가? 논어 자한편에 따르면 공자는 *'오유지호재? 무지야. 유비부문어아, 공공여야, 아고기양단이갈언'이라고 말했다.

*내가 지혜로운 사람으로 보이는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아는 게 없다. 보통 사람이 물어봐도 나는 멍해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다만 양단의 논리를 꺼내어 그가 납득할만하도록 성심성의껏 자세히 말해준다. 이러면 내가 좀 아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

 다른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만물에 능통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도 본다. 당시, 나는 당연히 군생활에 있어서 그들보다 나은 점이 없으니 배워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것저것 해내는 어린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에게 반성하기도 해서이다.

 병장이 되어서도 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선임뿐 아니라 나이가 더 어린 간부님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때쯤 친해진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 반말도 하며 유연성을 발휘하긴 했어도, 이는 정말 일부였으며, 상당 부분은 다 맞춰 드리며 명령 또한 충실히 따랐다. 뭐 그렇다고 이등병 일병 때만큼 각이 잡혀있었다는 건 아니다.  사실 부대가 타 부대와 달리 나보다 나이가 많은 간부님들이 많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커져 가는 내 머리를 꽉 붙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동갑이거나 어린 가부님은 2명 정도였다. 타 부대에서 우리를 지칭하기를 고인물 부대라고 했다. (간부님들 덕에)


 넷째, 체력단련이나 작업을 하는 데 있어 쉽게 지치지 않는 몸을 만들었다. 당시 2년 이상 접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왼쪽 팔꿈치 문제로 사실 군대를 갈 수 있나 걱정(?)까지 했었다. 자대에 막 와서도 크게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꾀병이었던 것인가? 그러기엔 너무 아팠었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병원 진단 결과 말단신경병증?인가 하는 병명도 있었다.

 육체 활동을 시작하니 언제 아팠냐는 듯 엄살 따윈 피우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나이도 거의 꽉 차서 들어왔는데, 늙어 빠져 가지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이왕이면 최대한 잘해서 행여 주특기 활동이 부족하더라도 체력 활동에서는 우수한 모습을 통해 동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하다 보니 운동이 좋아진 것도 있었다.


 다섯 번째, 계급이 높아지고 나서는 마치 이 부대가 내 부대인 냥 행동했다. 학습적 F다운 면모도 있는 편인데, 그렇다고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전방으로 올라가는 친구들에게는 포옹까지 해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살짝은 오바한거다. 처음 본 사이인데 마치 내 자식 위험한데 보내는 것처럼 군 것이다. 한참 지나서는 중대 문제로 대대장님께 편지를 쓰는가 하면 전역할 때는 후임들에게도 편지를 돌리기도 했다. 마음이 우러러 나와서 쓴 것도 있기에 내 이미지 챙기기에만 급급한 행동은 아니었다고 맹세한다.


 여섯 번째, 모든 인원의 이름을 반드시 외웠다. 다섯 번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부분이었다. 당시 행정반으로서 당연한 덕목이기도 했다. 우리 부대는 최전방에 배치하는 인원전방에 배치하는 인원이 같은 중대 소속인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중간에 중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이 바뀌었을 때는 전방에 소속된 인원만 기억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분들이 잘못했다기보다는 본 적도 없는 인원들을 기억하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 대신 기억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심리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인생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다른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다. 모든 인간의 실패는 그런 부류의 사람에게서 발생한다.

 이름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나의 관심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이 나중에 소위 말년이 되어서도 내가 성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를 브랜딩 하여 전역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 있고 편안하게 보내고자 했다. 사실 동료들의 시선이나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도전이기도 했다. 이렇게 쌓은 긍정적인 이미지는 군 내 인간관계에서도 업무를 보는 데 있어서도 호감 증대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상보다 더 나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원래 입대 전에는 어떤 이로부터 '너 관심병사 되는 거 아니야?'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이를 극복하고 나름 평탄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쓰고 보니 자랑인가 싶은데, 자랑은 맞는데 자랑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소심함의 전형인 나로서는 비록 약간 '연기'가 가미되었을지언정 이러한 행동임을 취하기까지 상당히 용기가 필요했음을 전하고 싶었다. 사실상 '생존 전략'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의 내 발버둥은 곧 나를 가치 있게 만들기 위함이었는데, 기업 내 서비스와 제품을 브랜딩 하고 매출을 증대시켜 브랜드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드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본다. 매출 증대는 곧 생존과 직결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브랜딩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차원에서도, 나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브랜딩 한다. 부정적인 방향이든 긍정적인 방향이든 말이다. 결국 모든 이가 참여하는 불가피한 사회적 과정이기도 하다.


 철학에는 '실존주의'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생각하는 주체가 아닌 행동하고 느끼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스스로 그의 본질을 창조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을 세계에 던지고 그 속에서 시달리며 몸부림치고 그리하여 서서히 그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재창조하며 살아가고 있다. 모두가 일정 부분 가면을 쓰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가면 너머를 함부로 의심하지 말자. 가면을 쓰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자. 이것이 곧 자신을 브랜딩 하는 일이다.


 


참고 자료

식탁 위의 논어 | 09 자한편(子罕篇)

<인간관계론>, 데일카네기

<포지셔닝>, 알 리스

AI 이미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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