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과연 개성을 대체하고 있을까?
지금은 50대의 나이 든 중년이 되어버렸지만, 소위 X세대라고 불리던 세대가 있었습니다. 그 이전까지의 세대가 일관적이거나 통일적인 복장이나 양식이 존재했다면 X세대는 말 그대로 '제멋대로'인 세대였습니다. 복고가 판을 치는 지금 시대에 와서야 'Y2K패션'이라며 유행하는 것처럼 굴어도 X세대 패션이 완전히 유행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제멋대로였던 개성을 카피할 수는 없죠. 그래서 기껏 따라 할 수 있는 건 상표를 떼지 않는다던가 하는 유명했던 몇 가지뿐입니다. '개성'을 대표하던 X세대는 어떻게 됐을까요? 최고의 개성을 살려서 사회를 변화시켰을까요?
일단 저는 X세대의 끝자락에 걸친 입장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X세대의 맛만 봤던 밀레니엄 세대에 가깝죠. 한 때 급변하던 시기에 사회의 모든 방향이 '개성'이라는 한마디에 휩쓸렸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표출하는데 거침이 없었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전 사회였다면 손가락질받았을 것들도 '개성'이라며 존중받았습니다. 당시 젊은 층이었던 X세대는 그러한 사회의 변화에 열광했습니다. 실질적인 문화개방은 밀레니엄 세대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지만 X세대는 이미 일본과 미국, 유럽의 문화에 빠져있었습니다.
서울에는 외국 뮤직비디오를 전문적으로 상영해주는 커피숍들이 생겼고 금세 붐이 일어서 여러 곳이 생겼습니다. 그 시절 유행의 첨단을 달리며 전파를 하던 진원지와 같은 곳들이었죠. 데이트 코스로, 그리고 대학생들이 공강 시간이면 몰려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나중에 운영하시던 분을 만나서 들었지만 문화개방 이전 시절이라 외부에서 압력도 꽤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은 딱히 없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저작권법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아서 CD나 Video로 구워와서 카페에서 상영하는 것에 대한 제한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X세대의 패션은 '개성'인 동시에 '세계화'의 포문을 연 셈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던 개성도 대부분은 외부의 문화를 차용한 것에 가까웠습니다. 특히 유행에 민감했던 가요계를 보면 그게 더 두드러지는데, 당시 유행하던 음악, 패션, 이런 것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요소들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표절 논란이 유독 불거지기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이전에 국내를 강타한 가수들은 거의 일본 음악의 카피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는데도 크게 문제없었습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아는 사람만 알던 문화'가 이제 대중들도 슬슬 접근할 수 있는 문화였기 때문이죠.
어쩌다 보니 X세대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지만 핵심은 개성에 있습니다. X세대의 문화는 개성이라고 불렸지만 사실 카피가 주류인 문화였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돌고 돌던 유행이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카피 문화였기에 이전 문화와 상당히 다른 양상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기말의 영향도 없었다고 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꼰대 같은 소리를 해보자면 세기말은 그 시대를 경험하지 않으면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 같은 게 존재하긴 했으니까요. 지금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는 것과 1999년이 다가오던 시점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결국 그래서 X세대 문화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복고의 역사와 특성상 언젠가 돌고 돌아 다시 유행을 하지만, X세대의 문화만큼은 예외입니다. 물론 유행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면 등장하기도 하지만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지는 않습니다. 보통 20-30년 주기라고 봤을 때 이미 X세대의 유행은 돌아왔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보는 X세대는 '레트로'가 아니라서 복각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래됐지만 '레트로'의 멋이 살아나지 않는 것. 결국 X세대의 '개성'이라던 문화는 뭐였을까요?
사실은 '개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제 잘 쓰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양성'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두 단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본적으로 개성은 '개인적 성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양성은 '집단'에도 적용이 됩니다. X세대는 '개성 있는 개인들'이었지만 다양성은 무리를 짓습니다. 그래서 꼭 개개인이 다양성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다양성에 속한 집단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자신은 다양하다고 인식할 수 있다는 거죠. 그냥 비슷비슷한 일부일 뿐인데도 말입니다.
개성과 다양성은 비슷하면서도 지향점이 다릅니다. 개성의 대가와 책임은 개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세대의 결과물은 오롯이 X세대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이불을 걷어찰 흑역사일 수도 있고, 은밀하게 감추어둔 자랑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양성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이길 때만 우리 팀'이 가능한 것이 다양성입니다. 다양하기 위해서는 전체에 대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기존의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자체는 비슷하지만 애매하게 다릅니다. 개성과는 다른 존중의 형태입니다. 이 미묘한 분위기가 제가 다양성을 '회피성 언어'라고 생각하는 근원입니다.
'개성'이라는 요소는 교육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의 교육은 학생들의 개성을 꺾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습니다. 잘하고 못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무언가를 드러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개성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타인과 다르기 위해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죠. 어떤 면에서는 자아성찰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저 남과 다르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개성이라고 우기면 나중에 '현타'가 오는 경우도 많았으니까요.
다양성을 요구하는 교육은 좀 다릅니다. 개성이 '자신만의 것'을 요구했다면 다양성은 메뉴판이 존재합니다. 선택지가 많이 있으니 그중에 고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거기 없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있겠지만 메뉴판이 있는데 사람들이 굳이 그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의 핵심은 타고난 다양성과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인종이든 성별이든 그것에 대한 평가를 멈추고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죠.
이 부분이 개성과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입니다. 개성이던 시절은 사람들이 그걸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이 내 조건이나 내 상황이 어떻든 그것을 받아들여 개성으로 표현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 인간인 이상 다른 영향을 배제할 수 없고, 창의성의 근원이 다른 곳에서 왔다 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X세대 시절에도 결국 '카피 문화'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시대는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고민에 직면해야 했던 세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카피가 딱히 비판받을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그저 '다양성'의 일면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죠.
그래서 X세대의 '개성'문화는 오롯이 그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냈던 것들은 '세대'의 문화가 아니라 오롯이 그들의 것입니다. 다만 '나이'만이 그들이 비슷한 영향의 세대를 살았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든, 예술 작품을 내놓든 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개성을 외치던 시대가 기억도 나지만 흑역사에 가깝습니다. 저도 얼굴을 덮는 앞머리를 기르고 락밴드에 미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디밴드의 음악을 좋아하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B급 문화 추종자들과 설전을 벌이곤 했죠. 지금은 다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그랬습니다.
현시대의 사회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이전 글들에서 많이 언급했습니다. 시대가 정보화시대로 넘어오고 너무 많은 정보와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기 너무 어려워졌고, 그 수많은 선택에서 틀린 것은 없다는 안도를 얻기 위해서 처음에는 '개성'을, 그리고 지금은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런데 개성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었다면 다양성의 책임은 '사회'가 나눠서 집니다. 과연 개인의 짐을 덜어줬으니 지금의 사회가 더 나은 사회일까요? 과연 덜 불편한 사회가 온 것일까요?
우리는 갈수록 많은 선택권을 손에 쥡니다. 사실은 언제나 열린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러한 진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어려웠고 그런 선택을 일반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죠. 없던 것은 정보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누구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을 처음부터 열어놓습니다. 더 이상 특별한 직업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연예인이 특별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다면 아이돌 서바이버 프로그램을 기점으로 조금 더 일반인에게 가까워졌고, 유튜버와 인플루언서의 시대를 겪으며 다양한 것들이 현실적인 직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개성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접근한다면, 자신들도 그들의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공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양성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기 때문이죠.
진로가 아니다 하더라도 수많은 선택지가 예전에 비해서 오픈되어 있습니다. 예전 글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에 골치 아프듯 아이들도 쏟아져 들어오는 선택지에 머리가 아픕니다. 높은 자유도는 '친절함'과는 반대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돕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다양성'이라는 틀을 씌웁니다. 개인의 책임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뷔페를 좋아합니다. 본인이 선택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본인이 선호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많이 먹으면 됩니다. 대신 다른 것을 좀 더 포기하고 말이죠. 내가 음식을 잘못 골랐거나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 없다면 그건 제 책임입니다. 그런데 뷔페에 음식이 한 5천 가지 정도 있다고 해봅시다. 일단 내가 거기서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알아내는 일부터가 골치 아픕니다. 그런데 거기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일단 한 번씩 먹어보기'라면 제가 좋아하는 음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수많은 선택지를 경험에 의해서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는 선택권을 열어주고 계속 꽝을 뽑더라도 기회를 줬으니 된 거 아니냐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꽝을 계속 뽑다 보면 나이를 먹습니다. 그동안 배운 건 뽑기를 뽑는 건데, 그건 '방법'이 아닙니다. 그냥 이거 해볼까? 저거 해볼까? 하는 것에 불과하죠. 그대로 나이가 먹으면서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흘러갑니다. 이게 지금의 '청년'이라는 세대의 범위가 늘어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이 별로 없기에 그저 선택만을 반복적으로 이어가게 된다는 것이죠.
어디에나 그중에서 잘하고 있는 사람들은 있습니다. 교육계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게 10명을 가르치면 그중 1명이나 2명 정도 잘 된 케이스만 뽑아서 성공한 교육이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상 나머지 8~9명이 헤매더라도 말이죠. 어차피 그 8~9명에게는 또 다른 선택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언젠가는 계속 뽑다가 되지 않겠냐고 미루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선택에 노출된다고 해서 선택하는 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경험에 의해 늘어나는 것이야 있겠지만 그렇게 숙달되는 것은 너무도 긴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무엇이 '잘한 선택'인지에 대한 기준부터가 모호합니다. 사실 그들은 성공이 뭔지, 목적이 정확히 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결국 그 상태에서는 뭘 뽑아도 결론적으로는 실패입니다. 다양성을 열어주는 게 핵심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다양성만큼 자본주의 친화적인 성향이 없다는 이야기죠.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선택을 합니다. 그때 그때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습니다. 최선의 선택은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지금 당장 옳은 것을 선택할지, 미래를 보고 결정할지 그러한 판단을 가지고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통해서 다음번 선택의 기준을 조정하죠. 계속 선택하다 보면 잘 선택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선택을 반복하면 잘 선택하는 게 아닌가요? 뭐가 문제라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의 선택에는 목적이 존재하며,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적어도 뷔페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먹고 싶은 것에 대한 취향이 이미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누적된 방향성이 있고 그것으로부터 수정을 하는 것이죠.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사람이 선택이 점점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죠. 그리고 선택지를 제시하는 쪽도 점점 교묘하게 자신들을 어필합니다. 약간씩 이름을 바꾸고 비주얼은 더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가짓수를 늘려서 제공합니다. 우리가 똑똑해지는 만큼 선택지를 제시하는 쪽도 똑똑해지는 거죠.
그런데 다양성과 선택에는 그게 부족합니다. 선택권은 열리지만 사실 뭘 위해서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지도 정하지 못하고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일단 선택하고 경험하는 것을 반복하면 다음 선택에서 점점 '선택'에 대한 경험을 얻게 될까요? 그들이 얻는 것은 '선택하는 경험'이 아니게 됩니다. 갈수록 많은 정보와 전 세계가 밀접한 환경으로 '가능성'이 열린 사회를 살기 위해서는 시간의 효율성이 중요하고 '선택'이 핵심인데 '다양성'은 선택에 대해서 기준점을 없애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럼 처음에 비교하며 언급한 개성은 어떨까요? '개성'이 최고였다 거나 그것이 성공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랬다면 지금도 개성의 시대에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때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들어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본인은 그냥 사람들 사이에 휩쓸리고 싶은데 본인만의 무언가를 추구하라고 계속 요구받으면 쉽지 않죠. 하지만 그러한 고민 과정은 개인들에게 기준점을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내놓은 결과물은 오롯이 그들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다양성'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책임'의 부재 말이죠.
결국 '개성'의 소멸은 개인적인 책임과 그에 따른 철학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양성'이라는 집단의 이데올로기와 같은 방어체계로 편입되는 것이죠. 일시적으로는 편합니다. 다양한 속성에 기대서 자신을 표현하면 편하거든요. 어른이니까, 여자니까, 남자니까, 학생이니까, 청년이니까, 한국인이니까, 지방에 사니까, 서울에 사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양한 집단에 속할 수 있고, 그 집단의 속성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게 다양성이죠. 기가 막히게 교집합을 찾아내서 절대로 자신이 고립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은 고립됩니다. 그래서 기를 쓰고 자신이 표방하는 다양성의 집단을 위해서 힘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다양성의 집단들은 이익집단화를 가져옵니다. 누구나 이제 홀로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결집하고 집단화되었을 때 성공적인 미래를 꿈꾸었겠지만 그건 오히려 분열의 전조에 가까웠습니다. 이익집단은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서 흩어지니까요. 그 너머의 개인의 철학과 가치를 바라보기에는 세상은 오히려 커다란 블록이 되어버렸습니다.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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