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의 상대성

시간은 단면의 잔상효과다

by 게인

잔상효과라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 그리고 사실은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부분의 디스플레이는 연속적인 것을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깜빡임을 아주 빠르게 반복해서 우리에게 잔상효과를 통해 연속적으로 보이게 할 뿐입니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깜빡일수록 우리는 그것이 연속적이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게이밍 모니터의 기준은 거의 144hz 이상을 기본으로 합니다. 1초에 144번의 깜빡임. 생각보다 엄청난 양입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우리가 감탄하면서 봤던 수많은 극장 상영 영화들은 60hz를 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60hz를 쓰면서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더 부드러운 환경을 오래 느끼지 않았다면 이 정도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연속성을 느낍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보던 일본의 만화영화는 보통 초당 8 프레임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디즈니에 비해 훨씬 적은 프레임을 썼지만 그 시절 우리는 그걸로도 충분했습니다. 인간은 상상으로 나머지를 채울 수 있으니까.












8k의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실은 4k 모니터도 아직 다 보급이 안된 현실이지만 8k 역시 이미 상용화가 된 상태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FHD 디스플레이로도 만족스럽게 활용할 수 있지만, 이젠 QHD도 뭔가 애매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HD 그래픽에 익숙해진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브라운관 TV를 보던 시절이 아주 옛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브라운관 TV를 보면 아마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 시절 그렇게 깨끗해 보였던 영상은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의 눈은 그보다 높은 환경에 이미 적응했습니다. 심지어 사운드는 어떨까요. 그 시절 가요톱텐을 TV로 보면서 소리가 안 좋다고 불평한 기억은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만 원짜리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어도 그거보다 훨씬 깨끗하고 웅장한 음질이 나옵니다. 사람들의 귀 역시 적응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커뮤니티를 달궜던 것 중에 1960년대의 올림픽 뜀틀 경기의 동영상과 2000년대의 올림픽 뜀틀 경기의 동영상을 비교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그저 점프해서 뜀틀을 한 바퀴 넘기만 했을 뿐이었고, 지금의 뜀틀은 구름판을 밟고 공중에서 몇 번을 몸을 틀고서야 착지합니다. 그걸 올리면서 같이 나오는 이야기는 취업시장과 인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전에는 컴퓨터 타자만 칠 줄 알아도 대기업은 아니어도 중소기업까지는 졸업만 하면 모셔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갖가지 자격증에 외국어 능력에 고학점을 가지고 있어도 취업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에는 별 능력도 없어도 취업이 됐는데 지금은 스펙이 아무리 빵빵해도 힘들다는 것이죠. 그 말은 어느 정도의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비교의 상대성'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리오넬 메시의 기량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고의 현역 축구선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아마 축구를 쭉 보면서 리오넬 메시의 전성기를 같이 봐온 10대와 20대들은 메시를 역대 최고의 죽 구선 수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역대 최고라며 꼽는 펠레와 마라도나 같은 축구선수의 동영상을 봐도 메시나 '우리나라에서 언급할 수 없는 그분'보다 특별히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더 최근에 나왔던 브라질의 호나우두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를 수 있지만요.


전성기 펠레가 지금 돌아와서 리오넬 메시랑 붙는다면 어떨까요? 어차피 가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럴 일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가정이 의미가 없기에 웹소설에서 그 많은 시간여행과 회귀가 판칩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축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역사상 최고'를 가리는 우를 범하고는 합니다. 그 시절의 것은 오로지 그 시절의 것입니다. 그게 시간이 갖고 있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비교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오래된 것들은 신화가 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때의 충격을 '부정확한 수단'으로만 전했기 때문입니다. 더 과장되고, 그 당시의 충격을 담은 문구나 그림으로 전승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상이라는 기록을 통해서 펠레나 마라도나를 메시와 비교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교로만 본다면 메시의 압승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저는 '마이클 조던'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전에 NBA 스타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K.A. 자바나 매직 존슨 같은 멋진 스타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마이클 조던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코비를 이야기하고 르브론, 커리 등등 수많은 다음 스타들을 이야기해도 저에게는 여전히 마이클 조던의 충격이 남아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단순히 기술만의 비교라면 지금의 스타들이 마이클 조던에 꿀리지 않습니다. 아니 당연하다는 듯이 더 날아다니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래서 '올 타임 넘버 원'을 꼽는 일은 어렵습니다. 대부분 그래서 기준을 같은 시간대로 정하게 됩니다. 그 시대에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남겼는지.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도 누군가는 주변 레벨이 낮아서 독보적이었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일도 왕왕 있습니다. 비교는 원래 그런 거겠지만 시간축이 틀어져 있는 비교는 더욱 그렇습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던 나에게 건담이나 에바의 영향력을 물으면 정말 엄청났다고밖에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데즈카 오사무, 토미노 요시유키, 미야자키 하야호, 오시이 마모루 같은 감독들의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에게 물어봤을 때는 원피스, 나루토, 블리츠나 진격의 거인, 귀멸의 칼날 같은 작품이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걸 그들을 붙잡고 토론하는 것은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서로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타인의 이야기는 귀를 닫아버리는 게 제일 마음 편합니다.


이건 모든 분야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비틀스의 음악이 줬던 충격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습니다. 스타워즈가 얼마나 충격적이었고, '쥐라기 공원'의 특수효과가 얼마나 난리였는지 알 수 있는 건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주 오픈된 마인드로 시대에 미친 영향을 비교해야만 어렴풋이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버블이 오기 전의 일본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문화가 발달했었다는 사실은 이야기는 들어봤겠지만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이어서 아는 사람들만 공유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 옛날이여~!'


이 노래가 나온 것 자체가 옛날이 되었는데 그때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저 노래가 뭔지도 모를 것입니다. 누적된 역사와 기록은 끝도 없는데 지금의 생산속도는 그보다 훨씬 빠릅니다. 내용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양에서는 예전에 비해서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산자의 숫자에서 비교가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피겨나 체조는 20대가 되면 은퇴를 합니다. E-sports 프로게이머는 20대 중반이 되면 노장 취급을 받습니다. 바둑도 이제는 20대 정도가 주축을 이루고 30대를 넘어서면 슬슬 뒷세대에 밀려납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30대도 애송이 취급을 받지만 어떤 분야에서는 그때는 이미 은퇴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나이나 위치만으로 모든 것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오롯이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중국의 고사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중에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강의 뒷 물결은 앞 물결을 밀어낸다.'라는 표현입니다. 이것만 따로 쓰이기도 하지만 후에 전해지는 글귀에는 '앞 물결이 모래톱에 스러지지만 뒷물결의 좋은 시절은 얼마나 가겠는가. 순식간에 앞 물결이 될 것 아닌가.'라는 내용이 붙어있습니다. 세대는 바뀌고 시대의 중심이 바뀌기는 하지만 그 또한 일시적일 뿐입니다. 사실 뒷물결은 언제나 자신보다 뒷물결의 앞 물결이니까요. 그걸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물결이 최고였다는 비교보다는 그 단면들의 잔상 속에서 연속성을 따지는 게 훨씬 의미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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