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청년'은 무책임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30살이 되던 해의 저는 꽤나 비장한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는 20살이 되면서 어른 혹은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지만, 사실상 대학생 시절에는 그런 취급을 못 받았죠. 20대 중반을 넘어 군대도 갔다 오고 대학교 졸업을 하게 되고... 후배들 앞에서야 복학생들은 자기들이 훨씬 어른인 것처럼 굴지만 사회에서는 여전히 20대 '아이들'에 가까웠습니다. 먼저 취직을 했든 어쩌든 20대의 우리는 그렇게 어색해 보이기만 했으니까요.
다만 그때는 그걸 '청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관련된 사업이라든가 뭔가 그런 것들도 많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서 당시 정권이 신경 쓰던 '창업'이라는 키워드도 '창업지원사업'은 존재하지만 '청년창업지원사업'을 굳이 따로 강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학교에서 하는 창업지원사업에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와서 지원하고 있었죠. 조금씩 어디에선가 청년에 관한 지원들이 생겨나고는 있었지만, 많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금세 20살의 끝자락에 다다랐고 그때쯤 청년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이 쉽게 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심지어는 IMF 시절보다도 취업이 심각해졌습니다.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고, 20대 후반은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청년'이라는 이름의 지원책들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인턴 지원제도'를 시작으로 말이죠.
그 당시 청년인턴 지원제도의 나이 제한은 30살이었습니다. 30살이면 대학 졸업 후에도 몇 년을 헤맨다는 뜻인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었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을 나이의 저는 대기업 공채에 매달릴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절대로 학점을 망쳐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데 워크넷을 통해서 찾아간 첫 직장에서 크게 취업사기를 당했죠. 사회 초년생이라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라 속절없이 당하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무언가 적어도 '사기당하지 않을 보장'이 필요했고, 그때 막 생겨난 지 얼마 안 됐던 청년인턴 지원제도에 지원했습니다.
뭐 결과적으로 사기당하진 않았고 나름 의미가 있었던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몇 가지 이유로 오래 직장생활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부서와 사업을 없애버리면서 전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거든요. 그렇게 청년인턴을 마무리 지으면서 저는 거의 20대 막바지가 되었다는 것에 조바심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책임감도 느꼈죠.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끝낼 때가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20대의 끝자락의 저는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교육단체를 설립합니다.
사실 제 얘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기한 건 제가 그렇게 30살이 되면서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저는 행정상 여전히 '청년'입니다.
아마 한 4-5년쯤 된 것 같은데, 제가 사는 '구'에서 조례로 구에서 하는 사업의 '청년'규정을 만 45세로 바꿨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저는 청년이라는 이야기죠. 단지 구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제가 청년을 벗어났다고 생각한 이후로 전국적으로 청년 관련 사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뭐든지 청년이라는 이름을 넣어서 지원하는 사업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년의 나이 제한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한동안 30살이었던 청년의 기준은 어느 시점에 35살이 되더니 지금은 대다수가 만 40세 미만을 기준으로 잡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청년을 졸업하지 못하고 십몇 년을 청년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와 함께 청년의 중심축도 옮겨왔다는 겁니다. 30살 기준일 때는 20대 후반이었던 청년들. 이 청년들이 30대 초반이 돼서도 청년단체나 지원사업의 중심에 있고, 다시 만 39세 기준에서도 이 청년들이 아직도 중심에 있습니다. 항상 청년이라는 이름 달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비슷비슷합니다. 누군가 청년 이라는 이름만 듣고 모이는 자리에 처음 간다면 아마 전체적인 연령대를 보고 혼란을 느낄 겁니다. 이들은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꽤나 오래 가지고 다니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사람이 바뀐다고 뭐 별거 있는 건 아니겠지만요.
뭐 위에도 설명했지만 그 당시 IMF의 후유증과 맞물리면서 시기가 좋지 않았고, 그때 문제였던 청년 취업은 지금도 문제입니다. 애매하게 끼어서 떠밀렸던 세대들의 자생력 부족을 문제로 그들을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보호한 것을 잘못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청년이 '보호'를 위한 틀이라면 이는 곧 벗어나야 하는 타이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근 십여 년간 봐온 청년이라는 타이틀은 보호대상이 아닙니다. 하나의 권력이고 하나의 이익집단이죠.
대부분의 청년 이름을 달고 움직이는 단체가 실제로는 대표성이 거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뭐 사실 대부분의 단체가 그런 것은 마찬가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나 공공 영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우후죽순처럼 전국에 펼쳐진 '청년창업'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들이 청년일 때 창업하고, 청년이 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들을 좋게 봐줘야 하는 게 청년이라는 이유라면 그게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최근에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고 있는 '청년 빚 탕감'에 관한 부분만 해도 그렇습니다. 빚에 대한 구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는 문제지만 적어도 '공정'과 '상식'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우려면 쉽게 접근할 문제는 아닙니다. 정말 취약하고 힘든 계층은 그 '빚'마저도 질 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대출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바닥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죠. 거기다 그 대출금의 사용 용도가 코인과 주식이라는 투기 용도였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기 책임의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도덕적 해이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년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는 왜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는 '청년'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뭐라고 느끼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꽤나 많이 들어봤습니다만 그리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최근 10년여 사이에 인식 자체는 더 나빠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래 청년지원 자체가 '약자 보호'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지금은 청년이 권력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자 보호를 받는 나이가 30대 중반의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죠. 아무리 대학교 앞에 가서 20대들로 명단을 채워와 봤자 대다수의 청년을 이야기하는 단체들이 30명도 될까 말까 하는 사람들을 채워서 대표성을 이야기합니다.
숫자의 문제도 문제인데, 결국 실질적으로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을 받을 사람의 숫자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전국적으로 20~39세의 인구수는 얼마나 될까요? 최소로 봐도 몇백만 명은 될 겁니다. 그중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지원받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그렇게 받아야 할 근거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들이 계속 사회적 약자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인가요? 30대 중반이 되어서도 그들이 계속 사회적 약자 상태에 있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전부터도 청년 정치나 청년정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청년이 보호받아야 할 존재라면 그만큼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제 청소년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사회입니다. 본인들의 책임과 권리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소년법 개정부터 시작해서 갈수록 더 어린 나이에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필요하다고 인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청년'이라는 타이틀만 30대 후반까지 약자로 보호받아야 할까요? 심지어는 곳곳에 '청년 참여위원'이니 뭐니 해서 자릿수를 채우는 예비 '정치꾼'들을 키우는 용도로 쓰기까지 합니다. 각 정당에서 '청년' 타이틀로 불러왔던 사람들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죠. 과연 그들이 정말로 청년을 대표했을까요? 애초에 그 20년 정도의 엄청난 기간이 한 군데로 묶이는 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방송에서는 MZ세대라는 말을 씁니다.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를 묶었다고 하는데, 왜 묶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러한 말을 쓰는 것 또한 우리나라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밀레니엄 세대와 Z세대를 묶은 이유는 적어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이렇게 뭉뚱그려서 처리를 해야 다루기 좋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청년이라는 같은 세력 안에서 갈등이 발생해도 입맛에 맞게 골라서 상대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말 잘 듣는 30대 후반의 정치꾼을 데려다가 대표를 시켜도 MZ세대고 아직 잘 모르는 10대 청소년이나 20대 초반 대학생을 데려와서 이야기만 들어줘도 MZ세대입니다. 얼마나 편할까요?
청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 20대 초중반이 겪게 되는 것과 지금의 30대가 겪는 것이 다를 텐데 지원정책을 뭉쳐놓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청년 정책인데 나이 제한은 아무리 30대 후반까지 풀어놓아도 어떤 것에는 20대 초반들만 몰리고 어떤 것에는 30대 후반들이 몰립니다. 알아서 잘 찾아가니 된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해당되지도 않은 엄청나게 많은 지원을 '청년'이라는 타이틀에 노출된 것만으로 받고 산 것처럼 둔갑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기업 위주로 누리게 되는 법인세 혜택을 모든 기업이 누리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셈이죠.
결국 핵심적인 부분은 청년은 '졸업'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청년의 기준이 나이가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청년이 갖는 의미는 '아마추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서 몫을 다하고 일가를 이루는 사람들이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다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나이가 청년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결국 언젠가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그 준비기간이 청년일 수 있습니다. '학생'이라는 타이틀로도 이미 그런 기간을 보내왔습니다만 기간이 부족했다는 뜻이죠. 그런 의미에서 '청년'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과연 지금의 '청년'이 그런 의미일까요?
그래서 '청년'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것 중에 정말 잘하는 건 보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속성이 아마추어니까요. 그래서 '청년 정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도 안된 사람들이 나와서 미숙한 짓을 합니다. 청년이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아니면 사실 다른 정치인들도 미숙하거나 '미성숙한' 짓을 하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럴 수도 있고요. 어째서 청년을 '우대권'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이미 아주 오랜 기간을 '청소년'과 '학생'이라는 타이틀로 살았습니다. 청소년은 실제 연령과 환경상 보호를 받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법상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고 학생이라는 타이틀은 이제 슬슬 밀려나는 추세이긴 합니다만, 여전히 나이 드신 분들께는 유효한 타이틀입니다. 아직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미숙할 수 있습니다. 틀릴 수도 있고, 앞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도 무궁무진하죠. 그래서 '학생'입니다.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배워야 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굳이 청년이라는 타이틀이 추가로 등장한 것이 정말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아니 만일 필요한 일이었더라도 과연 지금도 그 필요성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을까요?
청년은 어떤 면에서 상대적입니다. 언젠가 조금 더 고령화 사회가 되면 청년을 50대로 밀어 올리게 되는 날이 올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지금 우리가 '보호'하고 '지원'하는 청년의 의미와 맞는 걸까요? 사실 마을 청년회는 아주 예전부터 있던 조직입니다. 뭐 '새마을 운동' 이런 거 있던 시절부터 있던 조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쓰던 청년회의 의미는 조금 달랐습니다. 지금처럼 보호받아야 하는 청년조직이 아니라 '가장 왕성하고 활발한 활동력을 가진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었죠.
예전에 구술사를 기록하기 위해서 시골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마을 회관에 모여계신 노인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는데 저희를 안내해주신 분은 갓 60대가 되신 동장님이었습니다. 저희가 이야기를 들으러 가면 그분들은 '애들'을 불러다가 일을 시키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의 '애들'이 바로 동장님이었습니다. 그분이 '청년회장'이었으니까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아직 젊고 팔팔한(?) 사람이 50~60대 밖에 안된 자식 뻘 되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그래서 완전히 시골로 내려가면 청년 회장은 50대나 60대가 많습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지금의 청년으로 돌아와 봅시다. 일단 나이대로 보면 그 설정에 가까워졌습니다. 20대와 30대가 이 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의 축이라는 건 부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데 청년 지원정책은 여전히 '약자 보호정책'입니다. 이게 맞을까요? 대부분의 청년 정책은 '실패'에 보정을 주는 '기회 제공'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죠. 청년이니까 실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정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방금 말한 20-40대에게'만' 제공되어야 하는 이유가 충분할까요?
애초에 '청소년'이 책임을 덜 지는 이유가 그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이 미성숙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나 도전, 실패, 실수 따위에 대해서 조금은 더 관용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거죠. 물론 청년들에게도 기회는 필요하겠지만 책임은 대체 언제 묻게 되는 걸까요?
저는 청년들에게 기회를 빼앗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보통 청년들이 40%~50%의 가능성에서 도전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예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했던 말이지만 70~80%의 성공률이라면 누구라도 도전할 겁니다. 안정적인 기회라고 생각하죠. 내가 먼저 접근하거나 나에게 특별히 자원과 조건이 많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70~80%의 성공률은 이미 타인과의 경쟁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보다 낮은 50% 정도의 성공률에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아니 위에서 계속 청년과 기회에 대해서 안 좋은 말만 해놓고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청년들에게 더 기회를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맥락이 좀 다릅니다.
이 성공률이라는 것은 뭘로 이루어질까요? 환경과 상황 그리고 역량과 시기 등의 총체적인 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환경과 상황은 내가 바꾸기 힘든 조건이죠. 그렇다면 내가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은 뭐가 있을까요? 그건 역량 부분뿐입니다. 내가 역량을 키운다면 타인보다 더 빠르게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거죠. 결국 노오오오력 이야기하는 거 아니냐. 네. 맞습니다. 저는 꼰대니까요. 저는 언제나 노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노력에도 종류나 방향성 등이 존재하고 쓸모없는 노력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죠.
같은 일에서 시기의 차이가 있다면 결국 본인의 역량에 따라서 성공률이 결정될 겁니다. 누군가 열심히 준비한 사람들이 80% 성공률일 때 본인들의 능력이나 준비가 부족해서 40~50%의 성공률이니 도전하게 해 달라? 이런 부분이 잘못된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성공률은 '최소한' 일반적인 노력과 역량 하에서 도달하는 일반 성공률을 기준으로 이야기합니다. 본인들의 역량 부족으로 성공률이 낮은데 도전하게 해 달라는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죠. 마찬가지로 실패의 원인이 준비 부족에 역량 부족인데, 그걸 청년이니까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책임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공산주의 사회가 배척받고 무너지는 것을 오랜 기간 보아왔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같이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으로 보였던 제도들이 무너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책임의 부재입니다. 인간은 조금 더 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결국 책임을 덜 지고 권리만 더 갖기를 원하죠. 그런데 그런 실패를 경험한, 이데올로기가 성행하던 시절에는 무조건 '빨갱이' 취급하던 방법들이 지금은 표를 위해서 부작용조차 검토하지 않은 채 남발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제목을 기억합니다. 피우지 못한 기회와 불합리에 맞서 싸우던 8-90년대의 청년들을 기억합니다. 그런 기억들이 우리에게 청년을 가슴이 아리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기억되게 만들었죠. 그리고 지금의 청년은 같은 글자를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정치인들이 만든 이름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름이었던 청년은 기억에만 있습니다. 한번 구겨진 종이는 아무리 펴도 자국을 지우기는 어렵거든요.
@게인
커넥티드 인사이드에서는
4차 산업, 게임, 인문학 그리고 교육에 관해서
가볍거나 무겁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다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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