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렉스 세대의 행복
세상이 많이 풍족해졌다는 것을 느낄 때가 초등학교에 간 아이가 학교에 준비물을 가져가는 것보다 받아오는 게 더 많다고 느낄 때다.
시대가 변했고, 여전히 학교에서 준비물을 필요로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학교는 아이에게 많은 것을 준다.
어린이날 기념으로 학교에서는 아이들 모두에게 룸밴드 세트를 주었다. 예쁘고 알록달록한 고무밴드로 팔찌를 만드는 공예의 일종이다.
아이는 팔찌를 만들어왔다면서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아이 엄마는 그걸 보고 칭찬을 해주고 나서는 나를 바라봤다. 꽤 오래전이지만 나는 룸밴드 공예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독학으로.
"아빠가 같이 해주면 애가 좋아하지 않을까?"
거의 10년 만에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있던 룸밴드 세트를 꺼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한참 끙끙거리고 있다 보니 하나씩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룸'을 사용해서 만드는 아이와 다르게 코바늘만으로 만드는 나를 보면서 아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만들어달라고 했다. 나는 그래도 애들이 예쁘다고 좋아해 주는 것을 보면서 열심히 만들었다.
아이는 학교에 아빠가 만들어준 팔찌를 차고 갈 거라고 했다. 나름 뿌듯하게 생각했다. 선생님이 "예쁘구나" 한마디만 해주더라도 아이가 기분 좋을 것 같았다. 룸밴드는 학교에서 아이들 모두에게 준 거라서 가져가도 크게 문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아이에게 친구들이 팔찌를 보고 뭐라고 했는지 물어봤다.
"그런데, 아무도 팔찌를 하고 있지 않더라."
결국 아이는 눈치를 보다가 팔찌를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 저번 주에 받았던 건데도 아무도 팔찌를 하고 있지 않아서 자랑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자랑하는 게 중요해?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냥 차고 있으면 애들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까?"
"그런데 아무도 안 차고 있어서 혼자 차기 싫었어."
자랑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아이는 바로 룸밴드를 그만뒀다. 룸밴드가 예쁘다며 엄마한테 만드는 법까지 가르쳐주던 아이였지만 정말 금방이었다. 그날 이후로 아이는 룸밴드를 꺼내지 않는다.
과시욕은 누구에게나 있다. 특히 SNS가 활성화된 현대인은 더 그렇다.
'공감'이라는 허울을 씌워서 자랑하기 바쁘다. 심지어는 만족도의 많은 부분은 '자랑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SNS의 맛집들이 실제로는 '멋집'인 경우가 많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밴드 공연을 하던 입장에서는 더 그렇게 느낀다. 나 혼자 음악을 즐길 수도 있지만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야말로 공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동기부여는 중요하다.
하지만 과시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과시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비교'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비교에서 무조건 우위여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대부분의 것을 '과시'라는 상황을 즐기는 것인지 실제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혹자는 그렇게 시작해서 나중에는 바뀔 수도 있다고 하지만, 한번 '과시의 맛'을 들인 세대는 돌아오기 어렵다. 오히려 그 플렉스를 채우지 못했을 때의 허무함과 공허함이 더 크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즐거움으로 그걸 대체하기가 어렵다.
'플렉스'의 세대는 지금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