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철에 쏘아 올린 나의 병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메아리처럼 학교 전체에 퍼졌다. 친구 두 명이 팔을 한쪽씩 들쳐 매고 걸었고, 마치 포댓자루처럼 질질 끌려가는 내 등 뒤로 다른 반 친구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야, 2반 쟤, 또 실려 가나 봐.”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학교로 들어오는 구급차의 대부분은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과호흡과 불안증세, 어지러움으로 맥을 못 추고 자주 쓰러지고는 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구급차에 타면 구급대원은 내게 소리쳤다.
“학생! 정신 차려봐요. 학생!! 숨 크게 쉬어요!”
응급실에 실려가 수액을 맞고 누워있으면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이것은 익숙한 레퍼토리였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을 때면 코끝에 강한 소독약 냄새가 계속 맴돌았다. 그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소독약 냄새는 끔찍하다.
몸이 아픈 만큼 정신도 나약했다. 아니, 정신이 나약해서 몸이 아팠다고 해야 할까. 항상 예민했고, 정서가 불안했다. 또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초조하고, 긴장했다.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패닉상태의 우울함에 빠졌다. 급식 시간엔 밥을 먹지 않았고,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에 대해 자책했다. 마치 건들면 톡 하고 터져버리는 달걀노른자처럼 열일곱 살의 나는 여리고, 위태로운 존재였다.
다행히도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어서는 한결 명랑해졌다. 달걀노른자 같던 열일곱 살 때와는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았다. 늘 에너지 넘치고, 밝은 모습에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며 꽤 다이나믹한 대학 생활을 했다. 금속공예를 전공했던 나는 며칠 동안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이 잦았다. 다른 친구들은 금세 지쳐 간이침대에 몸을 눕힐 때, 나는 지치지 않는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밤새 작업에 매진했다. 집에서 자는 시간보다 학교에서 지내는 날이 많을 정도로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르바이트는 물론이고, 공모전, 대외활동 등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잠을 자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여기저기 벌릴 수 있는 일은 다 벌리고 다녔던 것이다.
“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지치겠다.”
라는 말을 자주 듣고는 했는데,
이런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난 전혀 지치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도 지치지 않고, 매일 들뜨는 기분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날뛰고, 일분일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해 불안함이 커져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던 나…. 는....... 어라? 어디서 많이 듣던 증상 아닌가? 마치 이것은 과거의 내 모습이 현재 양극성장애인 내 모습을 만든 신호탄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내 아픔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부터 우울증과 조증의 곡선 그래프를 타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양극성장애는 사람마다 그 변화의 주기가 다르다고 한다. 몇 주의 주기로도, 또 몇 년의 주기로도 찾아올 수 있다. 과거의 내가 그 몇 년의 주기에 해당되어 양극성장애의 호르몬에 잠식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는 내 성격의 일부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때의 나로 인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병원 진료실 앞 대기실에 앉아있으면 어린 친구들이 많이 온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혹은 씩씩하게 혼자서. 그런 친구들을 보고 있을 때면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왜 이곳에 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저 당연히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고 생각했던 아픔이 지나고 보니 지독한 병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생각하며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인생의 수많은 날을 조금이라도 치유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