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유를 얻어서 퇴사를 하는 것은 모든 직장인의 꿈일 것이다. 그런 퇴사가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다른 퇴사도 한 가지 자유는 생긴다. 시간의 자유.
퇴사를 하고 이제 시간을 어떻게 쓸지 오롯이 내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동안은 알람을 안 맞춰도 출근하던 때와 비슷한 시간에 눈이 떠졌다. 지금은 정해진 일정이 없는 날은 알람을 맞추지 않고 잔다.
내일 날씨도 모르지만 내일 내 하루가 몇 시에 시작될지도 모른 채 잔다.
지금 작업 중인 디지털 교과서의 스토리보드는 한 번 일을 받으면 2~3일 정도 뒤에 완성 파일을 보내야 한다. 처음에는 작업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는데 작업 시간이 점점 줄고 있다. 줄어든 작업 시간만큼 쉴 수 있는 구조라서 본능적으로 요령을 찾아 익히는 것 같다. 단축키는 살고자 하면 저절로 외워진다.
나는 물건으로 치면 오븐에 가까운 것 같다. '오븐형 인간'이라고 할까. 예열 시간이 길다. 일을 빨리 시작하면 일찍 끝내고 저녁에 쉴 수 있을 텐데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까지 참으로 오래 걸린다.
아침에 사과와 케일을 갈아서 먹는 것은 오래된 습관이라서 일어났을 때 이미 아침이 아닌 날도 그냥 먹는다. 씻고 집을 좀 치우고 사과 케일 주스가 다 소화되어 배가 고플 때 밥을 차려서 먹고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서 마시고 그러고도 좀 앉아 있는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오늘 작업할 분량을 계속 생각한다.
이제 진짜 해야겠다 싶을 때 컴퓨터 앞에 앉고, 일단 앉으면 쉬지 않고 일한다. 쉬지 않고 오래 앉아서 일하면 눈도 건조해지고 몸에도 안 좋은 건 알지만 일을 하다 보면 자꾸 그러게 된다.
이런 방식이 반복되는 걸 보면 오전에는 충분히 쉬고 그 에너지로 오후에 일을 하는 것이 잘 맞는 것 사람인 듯하다. 즉각적으로 작동하는 전자레인지가 아니라 예열이 필요한 오븐이라서 예열이 안 된 상태로 출근해서 오전에 에너지를 쏟아부어 일하는 것이 더 힘들었나 보다.
학교를 그만둘 때 내 선택을 '용감하다'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용기의 원천은 아마도 이전보다 나를 좀 더 알게 되었다는 점인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알면 선택이 쉬워진다. 썸 타는 관계도 아닌데 나는 나를 알아가는 단계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인 나를 이제는 좀 알 것 같아서 선택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줄었다.
당신은 무엇인가요?
나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순간들을 놓치지 말고 잘 포착하면 좋을 것 같다. 자신에 대해 알면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어두운 길을 불안해하며 걷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