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의 보자기에 곱게 싸져 있는 곶감 한 상자를 오른손에 꼭 쥐고 고향에 도착했다. 4년 만에 돌아가는 집에 가져가는 것이 고작 곶감 한 상자뿐이라 초라한 속내를 애써 감추며 헛기침했다. 동네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떠나온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 것에 눈물이 팽하고 돌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본가에 대문 앞이다.
매년 고향에 내려갈지 말지를 고민했다.
명절 때마다 내려오라는 어머니의 부탁에도 되려 소리를 지르며 뭣도 안된 내가 내려가봤자 좋은 소리 못 들으니 안 간다 버텼다. 나의 화에 엄마가 전화를 끊어버리면 누나가 다시금 내게 전화해 부모 가슴에 못 박는 일이라고 꼭 오라고 부탁해도 애써 무시했다. 그 시절 나는 3년간 공시생으로 노량진에 박혀 공부만 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패배주의에 찌들어서 가족들에게 못된 말만 했다. 내 못된 말에도 엄마는 괜찮다며 명절이 끝나면 서울로 올라가 얼굴 좀 보자며 나를 설득했고, 나는 그 말에도 와도 얼굴을 볼 생각은 말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몇 번의 거절을 하니 가족들도 지쳤는지 내게 오라고 권유하는 것도 잘 지내는 게 맞냐는 말도 점점 사라져 갔다. 그리고 3년째, 공부한다고 잠시 꺼두었던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이 쌓였었다. 누나의 전화였다.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한 통에 문자가 찍혀있었고, 문자의 내용은 할아버지의 부고였다. 곧바로 밖으로 나와 누나에게 전화했고, ‘암 투병 중이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너는 어떻게 할래? ’라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3일 뒤 시험과 할아버지의 죽음을 저울질했다. 그 저울질 끝에 나는 또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곶감은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음식이었다. 4년 만에 곶감을 손에 쥐고 가면서 가족들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을지, 그동안에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
눈을 질끈 감고, 대문 옆 작은 벨을 눌렀고,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이게 누구냐.”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외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목소리에 가족들이 수군거리며 하나둘 내 앞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엄마였다.
“보고 싶었다. 아들. 어서 들어와.”
“배신자. 너무 늦었잖아. 전 다 부치고 오는 게 어딨 냐!”
누나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깔깔거렸고, 그 순간 화목했던 가정으로 시간을 돌렸다. 나 또한 그 시간에 다시금 속하게 만들어주었다. 엄마는 두 팔 벌려 나를 안아주었고, 오른손에 들려있던 금색의 보자기는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