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생 시절, 언니가 재수했다. 언니는 수능을 망친 후 다시 한번 공부를 하겠다며 시골에 박혀서 공부하는 기숙학원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말했다. 교육비에 아낌없는 부모님은 형편이 좋지 못했음에도 역시나 비싼 기숙학원을 보내주었다. 그 여파로 언니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빠듯하게 살아가야만 했고, 언니의 재수를 온 가족이 도왔다. 그렇게 1년 뒤, 언니는 입시를 또다시 실패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꾸준히 공부하고 고등학교에 재수까지 했는데 입시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은 뒷바라지한 언니의 실망스러운 성적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였는지 내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대학도 내가 정해서 가라고 하고, 수시 면접을 보러 가는 것도 혼자 다녔다. 언니가 수시를 보러 다닐 때는 열 군데면 열 군데를 부모님이 항상 데리러 가고, 데려왔었지만 부모님은 면접을 준비하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나는 면접을 혼자 보러 다녔다. 딱, 한번. 엄마와 지방에 있는 대학교 면접을 보러 간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대학교를 골라와도 혼자 가라 하는 말을 하며 별 말없이 관심을 주지 않았던 부모님의 태도에 서러움을 느꼈다. 반면에 언니가 대학을 진학할 때, 엄마가 직접 서울의 유명한 학원에 가서 대학 상담을 받고, 입시설명회를 다녔었다. 명백한 차별과 방치였다.
나는 울타리 안에 방치되어 스스로 자란 양 같았다.
알아서 귀가한 뒤, 알아서 밥을 먹고 쑥쑥 자라는 일상을 보내는 어린양. 방목하여 키운 양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나를 엄마는 이렇게 칭했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애.’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은 아이라면서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여러 번 부모님께 요리학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모두 거절당했다. 하지만 꿈을 향한 마음은 강했고, 집에서 책을 사서 요리를 하거나 빵을 구워서 친구들을 나눠주며 꿈을 키웠다. 학교에서 열린 요리대회에 나가 수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를 아무리 보여주어도 부모님은 절대 지원해 주지 않으셨다. 언니의 교육에 열정적인 부모님의 태도와는 다른 모습과 행동을 내게 보여주셨다. 부모님의 외면에 상처받았고 슬펐지만, 더 못한 환경과 역경에도 꿈을 향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할 수 있다고 되새겼다.
내가 지금 하는 불만들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요리사가 되는 날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