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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말 Sep 07. 2023

몇 번의 기회

바도

몇 번의 기회          


  내가 다니는 피트니스에는 원형 탈모가 막바지에 들어선 아저씨가 있다. 평소 동료들이 ‘발모제 좀 발라봐'라고 한다거나, 몰래 쓰다듬는다거나, 두피 문신을 권유하는 둥 이리저리 놀림을 받고 있다. 우연히 듣기로는, 하루는 그가 미용실에 갔는데 ’머리숱이 너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는 슬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도저히 자를게 없다’라는 미용사의 냉담한 말을 듣고는 온종일 신경이 쓰인다고 시무룩해져 말씀하신다. 그의 동료들도 그날따라 놀리지도 않고 차분하게 듣고만 있는 분위기다. 로마 시대의 원로원이 쓸법한 월계관만큼의 머리털만 남은 아저씨. 드라이기 바람에 날리는 소박한 머리털은 마치 냉혹한 겨울 바람을 맞고 힘없이 스러지는 들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냐’ 한숨을 쉬며 머리를 말리는 아저씨를 보는 와중에, 나는 까닭 모르게 대학생 시절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를 불쑥 떠올렸던 것이다.     


  대학생 시절 술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남성이 일평생 만들어 낼 수 있는 정자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성인 남성은 생물적으로 일정 횟수의 정자를 배출하고 나면 더이상 생식 세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 여성 난자의 개체수가 미리 정해져 태어난다는 사실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남자도 그렇다는 것은 처음 듣는지라 왠지 선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건 분명 무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난자라는 것은 정해진 날짜에 맞춰서 정해진 개수가 따박따박 소진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정자는 어떤 운영 방법을 택하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크게 뒤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다.만약 어떤 남성이 젊은 날에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방종하게 정자를 마구 소진해 버린다면, 나이가 들어서 정작 아이를 갖고 싶을 때에는 남아있는 생식 세포의 재고가 변변치 않게 될지도 모른다. 마치 초반에 낭비해서 짜버린 치약처럼.     


  대체로 이런 유의 이야기는 ‘전해 들은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들은 것’일 뿐이라서 그 가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건 나는 이 엄청난 낭설을 사뭇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아닌게 아니라 술자리에 있던 우리 남자들은 혹여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남은 ‘기회’는 앞으로 얼마나 되는 것인지, 자신은 지금껏 전체 총량의 얼마큼을 헛되이 소비해 왔는지, 각자 인생의 여로를 점검해 나가듯 잠시간 생각에 빠져 들었다. 개중 애인이 한 번도 없었던 친구의 진지하고 심각스런 표정은 과연 ‘탕진’을 걱정하던 것일까 ‘악성 재고’를 걱정하던 것일까. 무척 궁금했지만 결국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뒤로도 나는 가끔씩 나에게 과연 몇 번의 ‘생산 기회’가 남았을까 하고 곰곰 떠올려보곤 한다. 어쩌면 그런 기회는 예전에 끝나 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처음부터 그런 기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문적인 의학 검사를 받았던 적도 없고 살면서 그것을 직접 확인할 일도, 다행인지,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곤혹스런 기분으로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으면, 때로는 여성들도 자신의 신체를 생각하며 어림 짐작을 해보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확신이 든다. 지금 나는 인생에서 몇 번째 기회를 소진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그것은 그 여성의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여부나 의견, 특정한 가치관이나 상황과는 관계없이 하는 ‘짐작’일 것이다. 누구든지 인생에서 자신의 과거의 가능성들을 재고해보고, 미래의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시간들이란 존재하기 마련일 테니까.      


  과연 ‘정자 총량설’은 사실이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군소리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의 ’생산력‘이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전체적인 양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한 인간이 삶을 살면서 정력적으로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는 활동력에는 아무래도 그 총량이 정해져 있어서, 사람은 스스로 타고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소비하며 무언가를 ’생산'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열심히 공부해서 ’지식‘을 생산물로 내놓고, 누군가는 첨단 전기 자동차를 만든다. 또는 그것은 하나의 가족이나 자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형태가 있는 것일 수도,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건 사람은 제한된 세월 속에서 제한된 기회를 십분 활용하며 나름대로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기회. 매일 나는 그 제한된 환경 속에서 몇 시간씩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가구를 만드는 대신, 격투기를 연습하는 대신, 봉사를 하거나 환경 운동을 하는 대신,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대신에 이렇게 인생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것은 글쓰기여야 했을까. 나도 잘 모른다. 나는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공들인 생산의 과정들은 결과적으로, 그저 무목적으로 배출된 정자처럼, 한낱 몸장난의 분출일 뿐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노력들은 어쩌면 깊고 무의미한 공허 속으로 빨려들어가 흔적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들을 한켠에 품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산성을 무엇에 소비하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기회란 대체 몇 번이나 될까. 살면서 그 누가 미용실에서 이발을 거부당할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는 예상치도 못한 어느 날 카프카의 성문이 눈앞에서 굳게 닫히듯, 매몰차게 그런 기회를 모조리 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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