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우리는 매일 오후에
부산에 있는 “고리원전에서 사고가 났고 “그보다 일 년쯤 전에는 사월에 눈이 내렸”다. 큰 지진 후 일본에는 “쓰나미가 몰려왔”다.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의 배경이다. 게다가 화자인 ‘나’와 늘 함께하는 ‘남자’는 방사능 피폭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몸이 작아졌다.
“작아진 남자는 어느 정도냐 하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절반 크기야. 강아지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머릿속에 강아지를 떠올려봐 그때 떠오르는 강아지의 절반 크기로 남자는 작아졌고 그러니까 남자는 내 두 손안에 들어온다.”
‘남자’의 크기에 대한 위의 묘사는, 화자가 우리임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 모두 떠올리는 강아지가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예 떠올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남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화자는 ‘남자’에게 무언가 예언을 해 줄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은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화자는 “중요한 것은! 우리는 대화를 한다는 것이다. 어제에 대해”라고 말한다. 예언보다 중요한 것이 ‘어제에 관한 대화’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예언은 성스러운 일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에서는 미래를 예상하는 일이 어렵다.
화자는 ‘남자’에게 계속해서 어제 있었던 일을 묻는다. 그리고 남자가 새로운, “미래의 것을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한다. 화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보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화자는 ‘남자’와 매일 산책하며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산책하는 사람들은 잘 지낼 것으로 여긴다. 어떤 일이 일어났든 산책을 하며 꽃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 잘 지내는 사람이다. 이는 화자의 생각이 아니다. 도쿄 의회에 속한 ‘원전 찬성론자’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화자도 ‘그렇구나. 어쨌든 꽃을 보기만 하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작품에서 ‘대화’는 ‘산책’과 같다. 이들이 같은 서울을, 같은 동네를, 같은 골목을 걷는 것처럼 대화도 어제 일을 묻는 것으로 되풀이된다.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자’가 작아졌다. ‘남자’는 어제마다 작아지고 화자는 매일 그 사실을 묻는다.
‘남자’가 계속해서 작아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남자’는 최초로 작아진 후 다시 작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은 계속 반복된다. 이것은 사고 이후 같은 날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이고, 달리 말하면 화자는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처음 생각해 본 것처럼 화자는 작품을 읽는 독자, 우리다. 작가는 언제든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원전 사고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며 사고 이후 남겨진 이들의 삶을 보여준다. 아무도 없는 삭막한 골목.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희미하게 남은 건물. 화자는 도시에 혼자 남겨져 있다. 작아져 대답밖에 할 수 없는 ‘남자’와 외로이 어제를 거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