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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Aug 01. 2023

보름스에서 루터 재판장에 서다.

유럽여행_24. 열한번째 날1





어젯밤 만찬을 즐겼던 그 자리에서 조식으로 아침을 열었다. 프랑스에서의 짧지만 풍성했던 여행을 마치고 독일 보름스로 향했다. 독일 향기 풍기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작별했다.




국경을 넘어 가는 길에 휴게소에 들러서 1유로의 티켓으로 화장실을 이용하고,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졌다. 화장실 이용하는 1유로 티켓으로 휴게소 상품을 구매하면 할인을 해 준다. 그러나 할인율이 적용되어 구매한 가격이 시중보다 비싸다. 그럼에도 1인 1유로의 할인율이 아까워서 음료와 감자튀김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면서 위로를 받았다.




휴게소_보름스 가는 길




휴게소 화장실 입구_1유로 티켓으로 출입




보름스는 독일 라인란트팔츠주에 있는 도시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남서쪽 약 60km 지점에 위치해 있고 5세기 초 부르군트왕국의 수도였다. 614년 즈음부터 로마가톨릭의 관할권에 속했던 보름스는 샤를마뉴 대제의 중요한 팔츠(프랑크왕국과 신성로마제국의 순회 행정궁)다. 중세에는 자유제국도시로 번성하였다.




보름스에서는 100회가 넘는 제국회의가 열렸다. 1521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는 마르틴 루터를 이단자로 선언하는 보름스 칙령을 제정했다. 보름스 대성당은 황실 대성당 중 하나이며 독일의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보름스는 와인산업 중심지로 리프라우밀히 와인의 기원으로 유명하며, 그 밖에 화학, 금속산업이 발달했다. 보름스는 도시철도와 버스의 대중교통체제를 갖추고 있고, 자전거 도로가 동서남북으로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름스대성당이 보였다.




주차장에 내리니 보름스대성당이 보였다.




보름스 대성당 가는 길




보름스 대성당 측면부에서 사진을 찍고, 정문으로 가는 길에 큰 건물에 보름스 제국회의 루터재판 벽화가 있었다. 황제 카를 5세가 루터를 소환해서 그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다. 벽면 전체가 벽화로 되어 있었다. 곳곳에서 루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맞은 편 건물 벽에 불상이 그려져 있었다.




보름스 제국회의 벽화 앞에서_루터 재판 모습




루터의 재판 벽화




보름스 대성당은 네 개의 둥근 탑과 두 개의 큰 돔 그리고 끝에 성가대석이 설치된 바실리카 양식의 형태를 갖고 있다. 내부는 붉은색 사암으로 지어졌다. 1110년에 축성된 옛 성당 건물의 잔재는 1층 평면 부분과 서쪽 탑의 저층부만 남아있다. 그 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1181년에 완공된 것들이다. 그러나 서쪽의 성가대석 부분과 아치 부분은 13세기에 시공된 것이며, 14세기에 남쪽 정문이 추가되었고 중앙 돔이 재건되었다.




보름스 대성당은 길이가 110미터, 넓이가 27미터인데, 수랑(십자형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부분까지 포함시키면 36미터이다. 회중석 부분의 높이는 26미터이고, 돔 아래부분의 높이는 40미터이다.




보름스대성당 모




브롬스 대성당 정면




보름스대성당 앞에서




보름스 대성당은 슈파이어 성당, 마인츠 성당과 함께 오토 왕조의 바로크 양식 3대 왕실 성당이다. 내부는 황제가 예배드렸던 곳이라 그런지 매우 화려했다. 한 사람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루터는 "죽어서 귀신이 되더라도 하나님이 없는 성직자를 괴롭힐 것이다." 고 했다고 하는데 루터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는 성직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성직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보름스대성당 내



보름스대성당 내부



보름스대성당에서 기도




루터광장으로 향했다. 먼저 찾아간 곳은 루터가 심문받은 주교궁이다. 지금은 하일스호프 미술관 안에 루터재판을 기념하는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박물관 둘레길을 걸어가는 길도 운치 있었다. 곳곳에 루터 광장 표지판이 보였다. 모퉁이에 라벤더가 피어 있었다. 하일스호프 미술관 입구에는  하일스호프 동상도 있었다.




하일스호프 미술관 정문




하일스호프 미술관




하일스호프 동상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신발 보양을 만들어 놓았다. 엄청 큰 데 우리 모두 한 사람씩 신발을 신고, 루터의 종교재판장에 잠시 서 보았다. 독일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으신 일행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모두 숙연해졌다.




루터는 1521년 1월에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파문당한 후에, 보름스 국제회의에 소환된다. 루터는 4월 16일에 보름스에 도착하여 다음 날, 4월 17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 앞에 서게 된다. 루터는 자신의 저술들과 입장을 철회하라는 압력 앞에서, 하루의 말미를 얻게 되는데 1521년 4월 18일 루터는 카를 5세 앞 다시 선다.  자신의 저술과 개혁의 입장을 철회하라는 요구 앞에서 모든 것을 거부하였다.




바닥 작은 동판에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r mir, Amen"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제가 여기 섰나이다. 저는 달리 어찌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마르틴 루터, 1521년. 4월 18일. 이라고 새겨져 있다.




루터의 종교재판 주교궁 모습



'내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섰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마르틴 루터, 1521년. 4월 18일' 이라고 새겨져 있다.




루터의 종교재판장




신발 보양_루터의 종교재판장




루터가 보름스 제국회의를 떠날 때, 독일군이 그를 호위하여 체포되는 것을 막았다. 루터의 영웅적인 행동에 많은 백성들이 찬양하였지만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루터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살해 음모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4월 24일 병사들을 보내 루터를 은밀하게 아이제나흐 근처의 발트부르크 성에 피신시켰다. 카를 5세는 루터의 단호한 입장에 충격을 받았다.




가톨릭 교도였던 황제는 오랫동안 불편한 관계였던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는 5월 26일 '보름스 칙령'을 발표하면서 루터를 정죄하고, 루터의 모든 책을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체제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아니었으므로 루터를 체포할 수는 없었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가 끝난 후 자신의 보호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1463~1525)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해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사용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피신 시기에 그의 두 번째 역사적인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1519년판 에라스무스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 것이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종교적인 의미 이외에도 새로운 표준 독일어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 전체에 대한 개혁으로 발전하였고, 독일인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죽음을 무릎 선 루터의 개혁의지를 되새기며 루터광장의 <루터와 종교개혁 기념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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