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졸린 눈을 끔뻑이며 남편을 바라봤다.
아파트 창문으로 올려다보는 하늘이 너무 맑았다. 가을을 머금은 하늘을 보니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춘천에 가기로 결정하고 차에 올랐다.
막 점심을 먹고 출발한 터라 올림픽 대로를 30여분 달리고 나니 잠이 쏟아졌다. 뒷좌석에 탄 아이들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역시나 고개를 떨구고 잠들어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눈도 서서히 감겼다. 자는 중간중간에 눈이 떠졌다. 곧 춘천의 푸른 산과 호수를 마주할 생각에 설렜다. 도로에 차가 거의 없어 금세 도착할 것 같았다. 하지만 졸음을 쫓아내지 못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다시 떴는데 내비게이션의 남은 시간이 아까와 비슷했다. 깨는 텀이 짧아졌다면 그만 자도 될 것 같았다.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았다. 이정표에 ‘내린천 휴게소’라는 글자가 보였다. 춘천 보다 동해 쪽으로 한참 더 가야 나오는 ‘내린천’ 이정표가 왜 벌써 있지? 설상가상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서울만 화창했던가? 춘천 날씨를 확인하지 못한 내 불찰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앞에 내린천 휴게소가 진짜 나타났다.
의아함에 남편을 바라봤다.
- 그냥 바다 보러 가고 싶어서.
남편은 ‘동해 러버’다.
춘천에서 40분만 더 달리면 동해가 나온다는데,
차도 안 막히는데,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동해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오오. 나도 오랜만에 동해 바다를 볼 생각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게다가 자면서 오느라 차 안에서 보낸 시간도 짧게 느껴져 횡재한 기분이었다. 내린천을 지나 양양 고속도로의 터널로 들어갔다. 긴 터널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는데 비가 내렸다.
- 산이라 그런가? 아래로 내려가면 비 안 오겠지?
남편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으로 질문을 하였다. 급하게 일기예보 앱을 켜서 날씨를 확인했다. 밤까지 비 예보가 있었다.
- 요새 일기예보가 틀릴 때도 많잖아. 이러다 그치겠지.
서울은 맑았잖아.
그런 바람과 상관없이 빗방울은 잦아들 줄 몰랐다. 우리는 바닷가 앞에 위치한 카페 겸 식당을 찾아갔다. 바다가 가까워지니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었다. 추웠다. 아이들을 깨웠다.
- 얘들아 도착했어. 모라도 좀 먹으러 가자.
추위에 양팔로 몸을 감싸 안으며 식당에 들어갔다. 이 식당은 바다 앞에 위치해 이국적인 풍경을 뽐내는 곳으로 최근 SNS을 타고 유명해진 곳이다. 그런데 비가 온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형편없었다. 세찬 바람에 해변까지 온갖 쓰레기가 떠밀려 와 있었고, 바다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과 의자는 급하게 실내로 옮겼는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마치 폐업 직전의 황량한 모습이었다. 다른 손님도 없 었다. 난 추위를 녹일 커피 한잔이 절실했고 아이들은 배가 고팠다. 식당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에 고민되었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갈 기력이 없었다.
음식을 몸 안에 넣으며 울렁이는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노력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에도 비가 내렸다. 내 마음을 알리 없는 비는 세찬 바람에 흔들려 사선으로 내리고 있었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는 불꽃놀이 터지듯 사방으로 물방울을 쏟아냈다.
남편은 그랬을 것이다.
자고 있던 식구들이 게슴츠레 눈을 떴을 때 윤슬에 반짝이는 바다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자마자 ‘ 우와! 바다다! ‘ 하며 눈이 번쩍 떠지길.
우리에게 그런 리액션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가장 우울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2시간이 넘게 운전하고 온 남편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그 길을 다시 운전해 가야 한다. 그렇다. 이 충동적인 동해행은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내일은 월요일. 다들 가야 할 회사와 학교가 기다리고 있다.
잠이 덜 깼던 초등학생 딸아이가 카페에서 요깃거리로 배를 채운 후 정신을 차렸다는 듯 말한다.
- 이제 닭갈비 먹으러 가는 거야?
- 으응?
한창 자랄 나이라 경치를 보는 것보다 먹는 것에 관심이 많다. 춘천의 맛있는 닭갈비를 먹기 위해 엄마 아빠를 따라나선 딸아이다. 딸의 말을 듣고 남편이 급하게 닭갈비 집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주변은 온통 횟집에, 생선구이나 물회, 장칼국수만 팔았다. 이곳은 동해니까.
- 이 근처엔 닭갈비 파는 곳이 없나 봐.
- 왜? 여기 춘천 아니야?
‘으이구. 바다를 바라보며 춘천 타령하는 딸아… 지도 먼저 공부하자꾸나.’
오늘같이 추운 날은 뜨끈한 칼국수를 먹어야 하는 거라고 설득했다. 근처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게 앞이 썰렁했다. 비가 와서 사람들이 동해에 놀러 오지 않은 걸까? 스산한 기운을 느끼며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데 안쪽에서 우리를 발견한 종업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영업 끝났어요.
강원도에 저녁 장사 안 하는 곳이 많은데 이곳이 그중 하나였다. ‘오늘 정말 망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이다. 밥은 먹어야 하니까 정신 차리고 다시 폭풍 검색을 했다. 이번엔 기필코 영업시간까지 체크하리다.
우여곡절 끝에 저녁을 먹고 나오니 사위가 어둑했다. 기분은 한없이 다운되어 있었다.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또 커피를 마시러 급하게 카페를 검색하긴 싫었다. 즐겨 가는 카페들은 이미 문을 닫은 시각이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고 파도도 거칠어 바닷가로 가기도 무서웠다.
아이들이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원했다. 편의점 앞에 주차를 하고 각자 원하는 맛을 하나씩 골랐다. 차에 타서 편의점의 환한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웃음이 빵 터졌다.
편의점 바라보며 아이스크림 먹는 건 집 앞에서도 할 수 있잖아. 우리 이거 먹으러 여기까지 달려온 거야?
오션뷰를 마다하고 기꺼이 편의점 뷰를 택한 우리는 한바탕 웃고 난 후 집을 향해 출발했다. 이 여행에 가장 실망감을 느꼈을 남편을 위해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비 오는 날, 밤 운전은 자신 없지만, 조수석에서 잠든 남편이 눈을 떴을 때 서울이 ‘짠’ 하고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서울엔 비가 오지 않았다. 비를 찾아 떠난 여행이 되어 버렸다. 동해를 다녀왔으나 갔다 왔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여행이었다.